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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 무장 경찰 Jan 12. 2024

당신의 관심이 우릴 빛나게 합니다.

경찰도 관심이 필요할 때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더운 것과 추운 것 중 힘든 걸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추운 것이라 말한다.


언젠가 칼바람이 부는 겨울밤에 대형 교통사고 처리한 적이 있었다. 경광봉을 들고 두 시간이나 도로에 서서 벌벌 떨었다.


불도 켜지지 않는 - 사실 배터리 방전이었지만 - 경광봉을 휘두르며 추위와 싸워야 했다.



흔히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더욱 굳세진다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4년이나 군복을 입었는데 추위 때문에 어지간히도 힘들었다.


내가 추위를 타는 이유가 군생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더운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나는 더위도 견디기 힘들어한다.





작년 여름. 그러니까 2023년 7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경찰 하반기 인사발령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나는 그날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겠다는 끔찍한 경험을 했었다.


6월부터 시작된 무더위는 7월에 더욱 강렬해졌다. 한여름에 제복에다 경찰 조끼까지 걸치면 온몸에 땀이 흐른다. 아마 더위에 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나는 잘생긴 후배와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순찰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다 SUV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브레이크를 밟고 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막힌 길이 뚫리지 않는 것이었다. 궁금해진 나는 차에서 반쯤 내려 앞을 내다봤다. 그러자 내 눈앞에 수십 대 차들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우리 관내에 교통 사망사고가 자주 났던 사거리가 있는데 바로 그 근처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사고가 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모른 체 하고 차를 돌리고 싶었지만, 어디 순찰차가 그럴 수가 있나. 경광등 달린 차가 보고도 그냥 갔다며 민원제기 당할 게 분명했다.


나는 교통사고를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차에서 내렸다. 강렬한 더위가 위에서 나를 짓눌렀다. 내 뒤통수와 등이 뜨거웠다.

숨을 들이마시자, 온갖 매연과 더운 공기가 내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눈앞에 자동차 행렬을 따라 걸어가 보았다. 줄 선 차들을 따라가면 원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30미터쯤 갔을까?


이윽고, 문제의 사거리에 도착했다. 눈앞에 광경을 본 나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냉동차가 - 탑차라고 말한다 - 도로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운전석 쪽이 바닥을 보고 말이다.


거기다 뒤에 냉동칸은 열려 있는데, 안에는 종이 박스가 가득했다. 개중에 반 이상은 도로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냉동차가 옆으로 쓰러지며 박스가 떨어진 게 분명했다.


박스는 거의 대부분이 터지거나 찢겨 있었다. 자세히 내용물을 보니, 한국 전통 음식인 김치가 들어 있었다.


시뻘건 김치국물이 박스와 도로, 그리고 하얀색 탑차 여기저기 잔인할 정도로 묻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태 경장. 이거 우리가 통제해야겠다."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처리할 테니, 너는 교통 순찰차와 구청 청소차 요청하고 나와."


나는 순찰차에서 경광봉을 꺼내 들고 비장한 각오와 함께 냉동차로 향했다. 운전자는 이미 옆 인도에 서있었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차가 넘어진 이유를 들었다. 그는 냉동차가 고장 나서 트레일러에 실으려다 그만 실수로 전복됐다고 말했다. 다친 사람은 없지만 문제는 김치 박스였다.


"저거 김치 어떻게 하죠?" 운전자에게 물었다.


"버려야죠 저걸 어떻게 먹겠어요."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김치를 다 가져가야 차들이 통행할 수 있어요."


"제가 회사에 말했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폐기물 수거 차량이 온다고 했어요."


"그럼 때까지 교통 통제할 테니, 오면 알려주세요."


나는 사거리 도로, 후배는 횡단보도에서 교통을 통제했다. 시간은 오전 11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해는 더 뜨겁게 내리쳤다. 도로 바닥을 보고 있노라면 이글거리는 열기가 올라오는 게 보일 정도였다. 머리부터 발까지 땀에 흠뻑 젖었다. 가만히 서있어도 숨이 차는 듯했다.



30분, 1시간이 지나도 폐기물 수거 차는 오지 않았다. 우리가 요청한 교통 순찰차와 구청 청소차도 아직이었다. 바닥은 더 이글거렸다. 내 이마와 얼굴까지 화끈거리고 발바닥이 뜨거웠다.


나는 후배가 걱정돼 그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후배는 이미 양팔에 파란색 쿨토시와 강도 높은 선크림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덕지덕지 바른 선크림 때문에 흰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 후배를 걱정하기보다 나를 더 신경 써야 할 판이었다.



1시간 하고도 30분이 지나자, 교통 순찰차가 왔다. 흰색 교통모를 쓴 경찰 두 명이 내리자 마음이 한결 든든했다. 각자 차가 막히는 길에 자리를 잡고 호각을 불며 차를 통제했다. 역시 교통 전문가 웠다.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문제의 김치 박스를 어떻게든 치워야 했다.


그때 인도에 서있던, 운전자가 소리쳤다.


"트레일러 도착했어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운전자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쓰러진 냉동차 뒤로 커다랗고 기다란 트레일러 한대가 위용을 자랑하며 접근하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트레일러가 번쩍번쩍 광채가 났다. 이제 차를 트레일러에 옮기면 될 일이다. 나는 뜨거운 더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왜 안된다는 거죠?"


"안에 김치 박스를 옮겨야 차를 올리죠. 김치 박스 다 떨어질 텐데. 그냥은 안 돼요."


선글라스를 쓴 트레일러 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냉동차 운전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회사에 전화하고 있었는데, 표정이 별로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시무룩한 얼굴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경찰관님. 폐기물 차가 오려면 두 시간 걸린다네요. 다른 폐기물 운반 때문에 늦는다는데 어쩌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더운 날씨에 화병까지 날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교통 경찰관이 다가왔다. 그는 흰색 교통모를 벗고는 말했다.


"그냥 우리가 김치를 저기 인도로 옮기죠. 그게 더 빠르겠네요."
 


교통 경찰관 말이 맞다.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도로 청소하는 구청 소속의 청소차가 엄연히 있고(도착할 기미가 없다), 회사 물건이니 그 회사에서 처리해야 하는 게 분명했기에 그 말을 아꼈을 뿐이었다. 나는 마지못해 교통 경찰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와 후배, 교통경찰 두 명, 냉동차 운전자. 이렇게 다 섯명이 김치 박스를 날랐다. 이미 터져 나온 빨간 국물이 내 손과 제복에 묻었다. 더운 날씨에 이미 김치가 익은 건지 시큼한 향이 퍼졌다.


도로에 쏟아진 박스를 먼저 옮기고 냉동차 안에 있는 박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한 번 옮길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반 정도 옮겼을 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술 마신 것처럼 어지러웠다. 심지어 뱃속이 뒤집히는 느낌마저 들었다. 헛구역질 몇 번 나오더니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그늘을 찾아봤지만, 왕복 8차로 도로 어디에도 내가 쉴 곳은 없었다. 게다가 다들 고생하는데 내가 힘들다고 빠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미안하기도 했고, 나를 보는 눈이 많아 민망하기도 했다.



우리가 김치 박스와 싸울 때 여러 대의 차가 지나갔다. 운전자들은 도로가 뚫리지 않아 불만스러운 표정뿐이었다. 왠지 경찰을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조차 쳐다보기만 할 뿐 그냥 지나갔다. (공장이 많아 점심 식사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나에게 뭔 일이냐며 툭 던지는 말로 묻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나는 답변할 기운조차 없어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바로 그때 3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경찰관들 고생하시네. 우리가 좀 도와줄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이 박스를 나르기 시작했다. 세 개, 네 개씩 얹어 한 번에 인도까지 날랐다. 평소 숙달해 온 노동 기술이 덕분인지, 솜씨가 남다르게 보였다. 어느새 남아있던 박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로에는 빨간 국물과 김치 조각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트레일러에 냉동차를 올리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모두들 지쳐 있었다. 제복이 땀에 젖어 훌렁 벗어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정신 차려보니 우릴 도와준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도움만 주고 인사할 새도 없이 가버렸다.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 해 여름은 더위로 쓰러진 사람이 꽤 많았었다. 심심치 않게 뉴스에도 보도되곤 했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으면, 나도 쓰러졌을지 모르겠다. 유격 훈련하면서도 느끼지 못한 과호흡을 그날 느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교통 통제는 내 역할이 맞다. 그렇다고 도로 청소까지 해야 할 건 아니었다. 각자 역할이 있는데 이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긴급신고 버튼에 매인 경찰만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느낌이다.


그때 나를 본 수백 명 중 누구 하나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단 3명뿐이었다. 이 3명 덕분에 나서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직 우리 일에 관심을 주는 3명이 있으니까.





나는 후배와 근처 거피숍을 들러 냉커피를 주문했다. 둘 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잠시 후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이켜니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2년 6개월을 보낸 지구대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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