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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정 Dec 15. 2023


하기로 한 것만 시키세요

[엄마 사장의 사업기록] 공정거래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계약서에서 '을'이거나 '수급자'로서 일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업무 범위를 조정하는 일입니다. 초기 계약서에 이미 비용에 맞는 우리의 역할을 기재하죠. 업무 범위에 따라서 총 견적이 결정되는데, 견적 협의를 다 마친 뒤 실제 일을 들어갔을 때 업무 범위를 넘는 일들을 요구하는 고객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모든 고객들이 가성비를 생각하는 거 같아요. 들어가는 돈 대비 더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거죠. 

그래서 너무도 가뿐하게 견적에 적힌 항목이나 수량을 무시하고 이것 저것을 요청합니다. 당연하고 당당하게 추가적인 일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가 "이 일 재밌지 않아요?" 입니다.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이니 니 일 내 일 따지지 말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해달라는 말이지요. 본인의 사원들에게는 요구할 수 없는 열정 페이를 요구하는 말이지요. 

다른 하나가 "다음에 더 좋은 일을 해봐요" 입니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 하나로만 국한하지 말고 이후에 다른 일도 줄테니 잘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해보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다음 일을 잘 안주시더라고요. 다음 일을 주더라도 이미 네고한 견적 또는 추가적인 일까지 포함한 비용을 기준으로 삼으시죠. 이런 일을 10년 넘게 겪다보니 '다음'을 기약하는 말은 '밥이나 한끼 먹자'는 인사와 다름이 없더라고요. 


이런 고객들의 요구에 딱 잘라서 "업무 범위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러면 다들 서운해해요. 어떤 사람은 분노를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잠시 삐져 있다가 풀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해달라고 조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3-4개월 정도 걸리는 프로젝트의 초반에 일어나면 분위기가 싸해지면 이후 진행에 어려움을 주죠. 그래서 초반의 부탁은 또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 약한 유리멘탈에게는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죠.




거래 관계인데 자꾸 정이 작용하는 것들이 너무 불편한데,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감정이 섞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일'을 하는 관계니까 할 말을 해야죠. 그래서 최대한 웃으며, 정중하게,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견적 범주에는 벗어나는 일이라서 어렵지만, 이것까지만 해드릴게요'라고 말합니다. 하하, 기싸움에서 진 유리멘탈 사장의 대답이란 이렇습니다. 정 억울할 때는 '해드릴 수는 있는데, 비용이 들거 같아요'라고 조심스레 운을 떼보기도 합니다. 물론 추가금액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요. 

 

이랬던 제가 오늘 드디어, 당당하게 고객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견적보다 넘치는 것은 우리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유리멘탈 사장이 드디어 각성을 한 걸까요? 용감하게 거절의 말을 던지고 나서 싸한 분위기를 견디기가 쉽진 않았어요. 이제라도 한다고 할까? 아니면 조금만 해주겠다고 양보해볼까? 마음 속에 여러 생각이 어지러이 돌고 있을 무렵, 저희 의견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안하는 약 1분간의 침묵이 저를 깊이 짓누를 때를 잘 넘기고 나니 정상적인 업무 범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계약관계에서는 '계약'이 핵심이죠. 서로가 약속한 범위 안에서 일하고자 계약을 맺었는데, 자꾸 관계에 치중하지 말자고요. 우리 사이에, 내가 기회를 주니까, 너희한테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등등의 억울함은 죄송하지만 넣어두세요. 저희의 레퍼런스를 보고, 여러 차례 회의도 하고, 초기 견적에서 이미 많이 네고도 하셨잖아요.


최인아 책방의 최인아 님이 태도가 경쟁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어디까지 고객의 의견을 들어주어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태도가 경쟁력일까? 해달라는 것보다도 더 해주어서 감동을 주어야 경쟁력이 높아질까? 눈 딱 감고 고객이 해달라는 대로 마음껏 휘둘려주면 사업이 대박이 날까?

독립 이후 약 4년, 최종 빌런과 지지고 볶으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내 멘탈만 털린다는 것입니다. 한번 휘둘려주면 그게 당연한 건줄 알고, 더 넘치는 요구를 더욱 당당하게 하게 됩니다. 매너는 온데간데 없고, 가끔 너무하다, 힘들가 표현해도 방어적이라고 비난하거나 아예 무시합니다. 


마음에 응어리가 쌓이고 미간에 주름이 늘면서 기준도 단단히 세워져갑니다. 태도의 경쟁력 이전에 갖추어져야 할 조건은 공정거래임을요. 계약관계, 말 그대로 돈과 일로 만났으니 일 얘기를 당당하게 했다면, 돈 얘기도 서로 당당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초기 업무 협의 시 불편하더라고 이 점을 한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요. 


일 얘기는 실컷 하고 돈 얘기에 기분 나빠하신다면 고객님, 이건 더이상 공정거래가 아닙니다. 저희도 자존감이 있는 인격체인데 자꾸 이러시면 아무렇게나 일하게 돼요. 들인 돈만큼 거두고 싶으시다면 고객님도 좋은 태도를 보여주세요. 우리의 일을 존중하고, 인간적인 예의를 갖춘 고객에게는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게 인지상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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