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장의 사업기록] R&R 정리하기
기획자의 일은 참 복잡한 것 같습니다. 다른 일에 비해 경계를 가를 수 없는 업무가 많아요. 영상 디자인은 영상만 만들면 되고, 편집디자이너는 편집만 하면 됩니다. 업무의 경계가 명확해서 모호한 지점들이 많이 없고 있다 한들 그것이 내게 속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죠. (제가 너무 여러분의 일을 단순하게 생각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기획은 좀 다릅니다.
이런 모호한 업무의 선은 파트너사와 협업에서 두드러집니다. 파트너와 협업하면서 어려운 순간이 비용을 줄이려 일을 덜어내었는데 실제로는 그 일이 무자르듯이 나뉘지 않을 때에요. 예를 들어 기업의 홍보책자를 만들기 위해 자료수집, 컨셉 기획, 목차 구성, 원고 등으로 일의 단계가 나뉜다고 해봅시다. (기획 파트만을 놓고 생각해보았어요.) 그런데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자료수집과 기획은 고객이 해서주고, 우리는 원고만 쓰기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일은 모든 것이 한 덩어리처럼 유기적으로 진행됩니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비용 때문에 나누어 놓았으니 자칫 잘못하면 작업하는 내내 '누구의 일'인가 신경전과 설전을 벌이게 됩니다.
여기서 갑을 관계가 드러납니다. 각자 자기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면 좋으련만, 자기 일은 대충 하고 이를 파트너사에 넘기며 교묘한 말로 이것이 너희들의 일이라며 혹은 별거 아니니까 해달라며 고객은 쓱- 일을 밉니다. 기획에서 마무리 했어야 하는 일을 원고에서 할 일이라고 미루면 글을 써야 하는 '을'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걸 받아서 마무리를 하는 식이지요.
많은 경우의 수로 이런 일을 알면서 당합니다. 파트너사로서 존중받지 못한 상황임에도 '을'이기에 고객의 요구를 거절할 방법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밀면 밀려야지... 어쩔 수 없이 떠밀리며 이건 '고마워 할 거야' 또는 '영업이 될 거야'라고 스스로를 토닥거려 봅니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 속에는 억울함이 또아리를 틀고 있어서 아무리 자위를 해도 세뇌가 먹히지 않습니다. 상황을 곱씹고 곱씹다가, 결국에는 무력함이라는 감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쁜 거라며 한참 이야기했지만 실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바보같이 굴었다는 걸, 내가 전략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상대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이기심을 부릴 수 있지만 나는 나를 위해 이것을 막아야 하고,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나를 갉아먹습니다. 이런 날은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박창선 대표의 책 <일을 잘하자고 했지 무례해도 된단 말은 안했는데>에서 이런 일을 꼬집는 일화가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도와드릴게요'라는 말 한마디에 맡지 않아도 되는 일을 맡아서 여러차례의 수정을 받으며 고생한 에피소드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 책은 이런 가이드를 줍니다. '제가 시간이 0시간이 있어서 000까지는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다음엔 작업자를 구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말하고, 어디까지 할 것인지 과업범위를 명확히 한 뒤 상대방이 할 일도 말해주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맡아달라고 떼쓴다면 적당히 둘러대서 피하라는 말도 잊지 않습니다.
오늘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맞아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려 봅니다.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좀더 단호한 말투로 말할 걸 그랬나? 머리 속에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다양한 대응 시나리오를 그려봅니다. "저희도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밤에 비대면 회의는 삼가주세요."라고 말할 걸. "이 일을 저희가 왜 해야 하죠?"라고 쏘아붙일 걸, 아니야 웃으면서 말하는게 좋으니 "주관사가 해야 할 일을 자꾸 저희한테 시키지 마세요. 기분이 상한 상해서 일하고 싶지 않으니 신뢰관계를 위해서 업무 범위는 잘 지켜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까?
복기의 시간은 억울함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그리고 한번 상처받은 지점은 다시 건드려졌을 때 더 아프고 힘들죠. 한 부분에 계속 생채기가 나서 이미 연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다시 용감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 선을 잘 긋는 방법들을 유튜브에 검색도 해보고, 책도 여러 권을 사서 읽어 봅니다. 아쉬운 것은 무례한 사람들, 무례한 상사에게 대처하는 법은 많은데 갑을의 역동성 안에 있는 저희같은 사람들에게 딱 맞는 관점이 없다는 것이에요. 교과서로 삼을 만한 사례가 없기에 앞선 사람들의 방식을 관찰하고, 여러 사람들의 조언과 책 속의 가이드를 따라해볼 수 있게 기록합니다.
복기의 시간을 반복하는데 그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행입니다. 내가 생각한 전략들을 시도해보는 것이지요.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어떤 전략이 먹히는지 해보며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솔직함이 가장 좋은 무기인지 에둘러 말하며 피하는게 상책인지 말이지요.
선을 긋는게 스스로 무례한 사람이 된 것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일을 따지세요.', '이성적이시네요.', '그 일 안해주셔서 우리 아이 유치원 설명회에 못갔잖아요.' 이런 말들 속에서 선을 그은 나를 탓하는 감정들을 느낍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이라면 이런 주변의 시선과 말들에 마음에 불편하고 어려워집니다. 사회적 인간으로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걸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음 요청을 할때는 눈치를 보게 됩니다. 선을 그으면서도 자신없는 말투로 미안함을 담아 이야기하곤 하죠. 이런 감정을 캐칭한 상대방과의 협상에서는 결국 끌려가게 되죠. 미안함을 캐칭한 상대방이 이런 저의 마음을 이용해 제 요청을 가볍게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선을 긋는 건 일을 하는 행위입니다. 선을 긋는 건 무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존중받는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스스로 존엄과 가치를 지키면서 내 일을 해내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마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를 대변할 사람은 나뿐이기에 스스로를 위해 용기를 내봅니다. 유리멘탈이라 선을 긋고도 덜덜 떨지만 하다보면 이것도 내성이 생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