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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수아 Feb 01. 2022

로맨스

내게로 와, 내 것이 되어야만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것

딸아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 

도저히 혼자 품고 있기는 버거운지, 내게 털어놓고 말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혼자 품기 버겁다면 이유는 두 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유는 상극일 가능성이 크다. 잘 풀리거나 잘 안 풀리거나. 딸아이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하는 순간, 나는 그 상극의 꼭짓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왕복 달리기 했다. 전력질주로, 꽤 여러 번. 


잘 되는 쪽에 가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싶고, 잘 안 되는 쪽에 가면 잘 안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한창 좋을 나이니 연애도 해 봐야지, 그 나이에는 연애처럼 좋은 인생 공부도 없으니까, 하는 생각에서 잘 되기를 바랐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다니던 곳을 나와 다른 일을 찾고 있는 중이니, 거기 집중하려면 잘 안 되는 쪽이었으면 했다. 물론, 너무 아프지는 않게. 말하자면, 로맨스가 아니라 '썸 타는' 정도로. 


속내를 더 물으니 딸아이가 말은 않고 시무룩해졌다. 잘 안 플리고 있는 것으로 판명 나자 절반 정도는, 안 되기를 바라던 마음이 쑥 들어갔다. 그 빈 구멍으로, 아직 어찌 된 건지 소상한 연유는 모르면서, 낱개의 감정들이 기어 나왔다. 불안감, 조급함까지는 그렇다 치고, 맥락 없는 이 억울함은 또 뭔지.


딸아이는 저녁을 먹지 않겠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 음악 소리가 문 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애가 속이 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남편에게 말할 때는 눈을 보지 않았다. 남편이 소화제를 찾으려 밥 먹다 말고 일어나 장식장의 서랍을 열 때 나도 모르게 쉰 한숨이 코로 새 나왔다. 설거지를 하고, 남편과 앉아 한국 뉴스를 보고, 이어서 영화가 시작되는 동안 내 신경은 내내 아래층 딸아이 방에 가 있었다. 아이는 방에서 여전히 나올 기색이 없었다. 


영화는, 몸 값이 천문학적인 유명 배우가 나왔지만 지루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남편이 풋 레스트에 올린 두 발을 자꾸 바꿔 꼬았다. 


-우리도 썸을 탔던가?

남편이 내게로 얼굴을 돌리는데 마침 하품을 하던 중인지 내 뺨에 더운 김이 닿았다.  

-썸?

-응. 썸. 요즘 젊은 애들이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에 한다는 거.

-아, 그 썸? 

-그래, 그 썸. 우리도 그걸 탔냐고.

다시 얼굴을 티브이 화면 쪽으로 돌린 남편이 피식 웃는 기척이 났다.

-30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해. 

이번에는 내가 남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무선 자판기를 눌러 티브이 화면을 정지시켰다. 남편이 소파에 기댄 등을 뗐다. 

-30년 전이라서 우리 연애 시절을 잊었다고?

-아니, 그럼 그걸 기억하는 게 정상인가?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나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30년 전 일이 생생하다고?

-그럼! 생생하지!

-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그걸 어떻게 기억해?

-왜 못해? 

-당신이 천재야? 그 옛날 일을 다 기억하게?

-왜, 왜, 왜 못해? 로맨슨데!


생전 가야 쓰지도 않는 '로맨스'란 단어가 내 입에서 튀어나온 하필 그 순간, 층계에서 딸아이가 나타났다.


-밥 남았어?


 나는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 부엌으로 내달렸다. 부리나케 밥을 뜨고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식탁에 내놓는 동안 딸아이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남들 다 하는 로맨스, 엄마 아빠도 해 본 로맨스...난 왜 이리 힘들까.


딸아이는 입은 웃고, 눈은 젖었다. 남편이 그런 아이를 보더니 내 쪽을 쳐다보며 눈으로 '뭔 일 있어?'하고 물었다. 나는 소파로 다가들며 눈으로 '모르는 척해'하고 말했다. 우리는 소파에 다시 기대고 앉아 영화를 재생했다. 나는 옆 눈으로 딸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젓가락을 들고 아무것도 집지 않은 채 어딘가에 눈을 박고 가만히 있었다. 넋이 빠진 듯, 혼이 나간 듯. 예의, 그 맥락 없는 억울함이 또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더 진하게, 더 매캐하게.


로맨스. Romance.

"romanicus," meaning "of the Roman style"


코빌드 영영사전

romance is a relationship between two people who are in love with each other but who are not married to each other.

해 봐야만 아는 것. 해 보기 전에는,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들어도 알 수 없는 것. 내게로 와 내 것이 되어야만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것. 


무엇보다, 잘 풀려야만 성립하는 것. 안 풀리면 넋 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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