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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수아 Feb 01. 2022

'방'이 말하는 것

[지금 우리 학교는]의 방들

소설 같은 영화(드라마)를 만날 때가 있다. 

보이는 것 아래로 겹겹의 층위가 느껴지는.


그 층위는 그 작품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보는 이의 층위가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그 층위의 겹을 구경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물이다. 물려버린 

인간들과 물리지 않고자 죽을힘 다해 뛰어다니는 인간들의 '달리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지우학'의 '달리기'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특별함 때문은 아닐지.

'부산행(지우학에서도 메타적으로 언급되는)'의 달리기가 '기차'라는 범상치 않은 공간과 맞물린 

특이성이 돋보였듯 '지우학'의 달리기도 특이한 공간(들)을 포착한다.


방, 이다.


과학실=바이러스가 창궐한 곳. 

과학(의학)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반면, '남용'과 '무모함'을 통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래를 기약한다. 그 결과로 빚어진 '변이('mutation'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주제에.


도서실=학생이 있어야 할 곳이지만 학생이 있기 싫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에게 득이 되는 공간. 

아직 물리지 않은 학생(청산)이 도서실 책꽂이 위에서 물리지 않고 버텨낸다. 좀비는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 위를 기어오르지 못한다. 책꽂이를 넘어뜨릴 수 있을 뿐이다. 물리기 직전의 학생이 책꽂이 위를 달릴 때 책꽂이는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학생은 급기야 책꽂이 아래로 떨어졌지만 책꽂이는 무너져서도 학생을 (잠깐이라도) 보호한다. 


음악실=좀비를 압도하는 원형인 소리의 권위

피아노에 깔려 맥도 못 추는 좀비. '음악'의 원형을 빚는다 할 수 있는 피아노-. 어떻게든 크기를 줄이면 '발전'이 되는 줄 아는 세상에, 수백 년이 지나도 결코 야합하지 않는 거대한 몸피의 악기. 소리에 민감한 좀비를 압도하는 그 찬란한 권위.



방송실=제 구실을 다할 때만 유익한.

이곳에 있는 학생이 다른 방에 있을 학생에게 거듭하는 말. "우린 말하지만 네가 하는 말은 안 들려."  짐짓 '소통'의 경로인 체하지만 '방송'은 '일방통'. 그래서 힘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내던질 때 제일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 일방적이어도 '고지력'만큼은 월등하나 그마저 누리지 못하고 떠난 학생들..."퇴선하세요." 이 한 마디를 전하지 못해 3백 명의 목숨을 앗았다. 

제 구실을 해야 할 때, 제 구실을 다한다면 방송은 실로 유익하다.



비품실=목숨을 연장하는데 필요한 무언가가 있는 곳. 

비품실에서 꽤 오래 살아남은 학생이 있다(나연). 그 안에는 먹을 것도 있고, 그러고 보니 쓸모 있는 게 꽤 많다. 우리는 그런 '비품'을 '창고'란 외지고 컴컴한 곳에 끌어다 담는다. 비품을 소중하다. 그 소용될 때를 만나기만 한다면. 그 '소용되는' 시간은, 우리의 삶 속에 늘 있다. 우리가 외지고 컴컴한 곳에 냅다 던져 놓고 문을 잠가둘 뿐.



양호실=다친 아이를 보살피는 곳이라 임신한 학생을 돌봐줄 수 없는 곳.

임신한 학생은 몸을 다친 게 아니라 외관이 멀쩡해서 양호실에 가봐야 말하지 않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말하지 않는 학생은 다쳐서 몸에 피가 나는 학생의 뒷전으로 얼른 밀린다. 몸의 겉을 다친 게 아니라 속을 다친 학생을 화장실로 내모는 곳. 학생은 화장실에서 홀로 그 상처를 수습한다. 외롭게, 서럽게, 참혹하게.



옥상='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 없는 꼭대기

'옥상'은 어딘가에 꼭대기. 그래서 누구라도 올라가고 싶어 하는 곳. 위로, 위로, 더 위로. 그 한편으로 학폭에 시달리는 학생이 뛰어내리기 위해 올라가는 곳. 학생들이 어른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곳. 폭력이 자행되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통로. 좀비가 들끓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통로. 오늘도 위로, 더 위로 올라가려 기를 쓰는 우리도 살기 위해서.


옥상은, 막상 올라갔을 때 그 순간은 짜릿하지만 계속 있다 보면 한없이 외로워져 결국은 다시 내려오거나 그만 뛰어내리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다만, 모닥불을 피우고 누군가와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옥상이란 '높은 곳'에서의 '모닥불'은 사람과 사람의 연대. 연대 없는 '꼭대기'는 가치를 잃은 절대 고독. 옥상에서 혼자 살아남은 학생이 있었다. 

'연대'를 이루지 못하고 이기심에 고독을 택했던 그 아이는 '연대'를 맺었다고 착각한 친구에게 물린다. 제각각 다른 삶의 무늬를 가진 아이들은 '옥상'에서 '연대'를 이루나 옥상에서 구출되지는 못한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내려와' 생존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방에 머물고 있나.
당신은 지금 그 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그 방에서 누군가와 연대를 이루고 있는가.


나?

나는 지금 '책상'에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맺을 연대에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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