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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Aug 11. 2019

시시한 휴가를 위한 도서 추천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황경신



떠나는 마음속에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과
더 잘 돌아오고 싶은 바람이 함께 자리합니다. 당신은 어느 쪽이신가요? 쉼이란...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주는 시간일 것입니다. 바닷가 민박집 해먹에 누워서 읽으면 딱 좋을 책, 챙겨 가세요.





<생각이 나서>의 저자 황경신을 기억하는 독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녀의 떨림 있는 문장을 읽어보리라 오랫동안 찜 해두고 있었는데요. 정작 책 글이 아닌 노래의 운율로 그녀를 만났습니다.



오늘은 노래를 부르러 가자.
어느 날 당신이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거였다.
말로 하기에는 조금 쑥스러운,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전하고 싶은, 그런 이야기.
그날 당신이 불렀던 이야기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오늘 나는 쓸쓸하다.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당신의 마음이 그토록 선명하게 발현되었던 순간,
나는 아름다움에 취해 그저 당신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 <생각이 나서>, 황경신



황경신이 쓴 이 짧은 글은 가수 한영애의 노래인 ‘부르지 않은 노래’의 가사로 다시 태어났는데요. 문장이 다듬어져 노래 가사로 사용될 만큼 황경신 작가의 글은 감각적이고 또한 결이 곱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드러내지 못한 채 잊혔던 마음, 그래서 가슴속에 공허하게 남은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어요. 세상에는 사랑한다는 말과 다름 아닌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하여 나와 관계 맺는 무수한 너의 세계가 바벨탑이 됩니다. 노래 가사로 다시 태어난 황경신 작가의 글귀를 곱씹으며, 가수 한영애의 노래 ‘부르지 않은 노래’를 함께 들어보시죠~



황경신 작가는 그녀만의 독특한 감수성 짙은 문체로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그림 같은 세상>, <생각이 나서>, <위로의 레시피>, <눈을 감으면>, <반짝반짝 변주곡> 등 다수의 책을 펴냈습니다. <나는 토끼처럼 귀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그의 스무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림에 부치는 71편의 짧은 글



이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에 대한 발현, 작가는 이 순간을 ‘매혹’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는 책의 서문에 ‘존재한 적 없으나 이제 존재하게 된 무엇은 타인의 감각, 시각과 촉각과 후각과 청각과 미각을 자극하고 그의 세계를 간여하는데요. 이인 화백의 그림은 그런 방식으로 나의 세계 안에 낯선 길들을 만들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구성의 책은 그림과 글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란성쌍둥이 같습니다. 글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빈 구석의 이야기를 이어가는가 하면, 때론 가령(假令), 운명(運命), 기억(記憶), 시간(時間), 연인(戀人), 이해(理解), 인연(因緣), 중력(重力), 질문(質問)’ 등 한자를 풀어 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또는 한 폭의 그림에 ‘이어지다’, ‘벌리다’, ‘지키다’, ‘묻다’, ‘기대다’, ‘멎다’, ‘감추다’ 평범하게 우리 곁을 지키던 단어를 넣어 세상에서 하나뿐인 상상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출처: 드림소담


책의 첫 장을 펼치면 무채색의 그림들이 나타납니다. 사람의 얼굴을 닮은 듯한 그림, 상징적인 검은 마름모꼴, 바닷가 해송 숲 같은 이미지 앞에서 황경신은 조율의 의미를 연상합니다.


‘우리 이렇게 하나의 세계에 담겨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에 잠기고, 무언가를 조율한다는 것은 의견이나 삶을 조율한다는 것은 다른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고유한 음을 찾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당신은 당신의 소리로 빛나고 나는 나의 소리로 당신의 세계를 밝혀 멜로디는 화음이 되고 화음은 노래가 되고 노래는 시가 되어주기를 이렇게 우리 하나의 세계에 담겨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여러 그루의 나무가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듯 서로의 잎을 마주 대고 선 그림으로부터 작가는 화이부동 (和而不同;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아니함)의 삶을 간파합니다. 세상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소리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거죠. 그녀의 사고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과 동일해지려는 애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또 다른 인상적인 작품, 붉은 잉크가 번진 듯 점들로 이루어진 그림에서 작가는 '멎음'을 발견합니다. 붉은 점, 나뭇잎, 단풍, 가을, 햇볕, 가벼움...... 생각이 흐르고 순간 세계가 멎습니다. 그녀는 인생이란 통과해가는 찰나마다 존재하는 무의미의 의미를 붙잡는 것.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책 속 밑줄 긋기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
어쩌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떨림 그 자체가 아니라 떨림이 지나간 후의 여운일지도 모르겠다. … 우리는 떨림의 순간에서 떨어져 나와, 어리둥절한 채, 점점 큰 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물결에 밀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중심을 그리워한다. …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과 그들이 주고 간 여운, 혹은 망각. 삶은 계속되고 살아가는 동안 아무것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19P)


문신
지속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영원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고 또 초월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았다. 왔다가 가는 봄이 영원이며 피었다 지는 것이 영원이며 그리하여 사랑이 영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53P)


사소하게
사소한 무심함으로 울다가 사소한 다정함으로 웃는다. 사소하게 기대하다가 사소하게 실망하고 사소하게 위로를 구한다. 사소하게 숨기거나 사소하게 드러내거나 사소하게 자랑하다가 사소하게 후회한다. 사소한 인연이 사소한 기억으로 가까워졌다가 사소한 망각으로 멀어진다. 나의 삶이 온통 사소함으로 채워져 있으나 사소한 행복은 가볍지 않고 사소한 견딤이 쉽지는 않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절망이 사소하지가 않다. (151P)

 
위의 문구들을 읽다 보면 새삼 작가의 찰나에 대한 깊은 사유와 그를 담백하게 표현하는 능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곱씹고 또 곱씹어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이 문구들은 단연 이 책의 백미라도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떨림, 지속, 사소함 등의 일상적 상념을 그녀만의 문장으로 담백하게 풀어내고 있어, 읽을수록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책에는 작고 평범한 의미에서 보편의 진실을 캐는 그녀의 깊디깊은 사유의 폭이 녹아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나 아닌 타인이 지닌 생각의 실마리에 불과하겠죠. 아무리 훌륭한 해석이더라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읽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책에 실린 그림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숫자만큼 다양한 해석이 나와도 좋을 것 같은데요. 이 한 권의 독서가 주는 효용이란 ‘토끼처럼 가만히 귀 기울여 내 안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스스로 쑥쑥 자라는 휴가 보내시길 바랍니다.


*SK하이닉스 블로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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