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디자인은 맥락 속에서 새로워야 한다
"새로운 느낌이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충성고객도 잡아야하니, 친숙해야 합니다."
"!!"
새로우면서도 친숙하게라... 마치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하면서 요리경력 60년의 할머니 손맛이 느껴지게 해달라는 이야기같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이 첫 디자인 회의 때마다 심심찮게 들리는 걸 보면, 이러한 느낌을 원하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과연 그 이유는 어떠한 것일까?
디자인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다. 이전 글(https://brunch.co.kr/@yjjang/4)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디자인은 디자인 목표를 부합하기에 가장 이상에 가까운, 현실적 대안이다. 이는 최적의 디자인이 어떤 정해진, 특정의 답이 있는 불변의 대상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특정한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은 무수히 많으며,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상과 방법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제의 이상적인 방안은 오늘의 일반적인 대안이 되며, 어제의 불가능한 대안은 오늘의 현실적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 속에서 '좋은 디자인 안'은 멈춰있지 않게 된다.
또한 정성적으로 새로운 디자인 안은 새로운 영감과 가치를 추구한다. 이는 디자이너의 창작자 중심적인 측면과 향유하는 소비자 중심적인 측면이 모두 반영된 결과이다. 디자이너는 기존의 디자인 안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가치와 방향성을 추구하는데, 이는 디자이너의 개성과 영감을 디자인 안을 통해 구현하고 남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루이지 꼴라니가 디자인한 위의 피아노는 디자이너의 강한 개성이 드러나는 좋은 예이다. 피아노라는 원형에 디자이너 본인의 개성인 유체역학적 형태를 적용함으로써 강한 개성을 준 것이다. 이러한 디자이너의 성향은 예술작가와도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
한편, 소비자들의 눈 또한 계속 변화한다. 심리학에서 '신기 효과(novelty effect)'라고 부르는 이론은 인간의 주의집중이 낯선 대상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더 강해짐을 설명하는데, 무언가 새롭고 낯선 대상이 있으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일어나면 그 대상은 관심을 끌지 못함을 의미한다. 디자인이 계속해서 새로움을 추구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처음 살 때만 해도 첨단적으로 느껴지던 아이폰이 오랜만에 보니 골동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기술은 더 슬림한 대안을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발전했으며, 우리의 눈은 계속 새로운 자극에 익숙해졌다. 이렇듯, 디자인은 기존의 대안을 일정 부분 부정하면서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러나 맥락은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서 아주 파격적인 새로움은 불가능하다. 디자인의 맥락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맥락이라고 하면 '브랜드' 관점에서의 이미지, 감성, 가격, 사용자 경험 등일 것이다. 아무리 새로움을 추구하더라도, 다수의 경우에서 디자인 결과물은 산업활동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이러한 맥락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높은 브랜드 가치로 오랫동안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쳐온 코카콜라는 그 특유의 색깔과 리본형태 만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각인시킨다. 이 친숙함은 아무리 그 적용되는 대상의 형태가 바뀌어도 고유한 것으로 남아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개성을 보인다.
만약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해서 코카콜라의 색깔을 초록색으로 바꾸거나 리본 형태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면 그 결과물은 더이상 코카콜라가 아닌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새로움을 강조하면서 코카콜라가 가지고 있던 많은 특징들을 버렸던, 그 유명한 뉴 코크(New Coke)사태 역시 이러한 브랜드 기대에서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문제이다. 맛도 패키지 디자인도, 폰트도 다르게 나왔던 새로웠던 뉴 코크는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더 맛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야심차게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이는 코카콜라의 암흑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소비자가 기대하는 코카콜라의 '이미지', '가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브랜드를 가이드로 삼아야 한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클라이언트들이 '새로우면서도 친숙한' 디자인을 요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새로움을 통해 소비자들의 이목과 관심을 모으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디자인도 소비자들의 기대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결과물은 소비자의 이탈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친숙해야 한다.
무인양품의 벽걸이형 CD 플레이어는 새로우면서도 친숙한 가치를 추구한다. 환풍기라는 제품의 사용성을 계승해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면서도 형태나 비율, 소재, 색상 등에서 무인양품이 줄곧 유지해온 브랜드 가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무인양품 브랜드 가치
-
디지털 < 아날로그 | 화려함 < 순수함 | 도전적 < 안정적
좀 더 자세히보면, 무인양품의 브랜드 가치는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가깝고 화려함보다는 순수함에 가까우며, 도전적이기보다는 안정적이다. 이러한 가치들을 배경에 두고 CD플레이어를 만들어야 한다고하면 아날로그적 사용성과 깨끗한 외관, 그리고 대칭성과 정비율을 활용한 위의 디자인이 그 가치에 부합하게 된다.
즉, 어렵고 까다로워보이는 위의 요구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브랜드 가치를 가이드라인, 경계로 삼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디자이너 개인이 가진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해도 된다. 무조건적인 새로움, 혹은 친숙함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의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고려해두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논리와 직관의 조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개성과 영감만이 강조된 디자인은 새로울 수는 있으나 지나치게 낯설거나 사용하기 어려워 외면받을 수 있다. 논리만을 따른 디자인은 개성과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기계적인 답만을 생성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신선함을 익숙한 맥락을 통해 구현함으로써, 디자인은 당대에 보다 이상에 가까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