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힘의 조정 없는 지엽적 개선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우리말에서 '비'라는 접두어는 '아니라'는 부정의 뜻으로 흔히 쓰이지만, 이와 동시에 뒤따라 오는 말의 격을 낮추고 뜻을 왜곡시키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비정상'이라는 말은 '정상'이라는 말에 대치되면서 단어를 들었을때 '결핍'이나 '손상', '오류' 등의 단어를 연상시킨다. 비정상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이는 사례는 J방송사의 인기 TV프로그램 외에는 거의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흔드는 단어, '비정규직'이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이란 말 역시 정규직이란 단어에 비해 어딘가 격이 모자란 느낌으로 활용된다. 스스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는 자조적인 어투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성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는 '다수'를 중심으로 이해되고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권의 문화가 체면과 눈치를 강조해온 것이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 문화는 긍정적으로는 서로에게 해가 되는 일을 삼가고 문제가 될 만한 일을 법적인 규제 없이도 사회적으로 방지한다는 효과를 가져왔고,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왔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는 암묵적인 다수의 동의 체계에 사회 구성원들을 따르게 함으로써, 소수의 의견이나 지위를 억압하는 방향으로도 진화해왔다. 다수의 정상과 소수의 비정상을 구별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문화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떄문에 영어의 'abnormal'과 우리말의 '비정상'은 뉘앙스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irregualar'와 '비정규적'이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객관적인 사실-일반적이지 않은, 시간적 불규칙성-에 더 방점이 찍히는 영어 단어들에 비해, 우리말의 단어들은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이미지를 함께 전달한다. 여기까지는 그러나 큰 문제는 없다. 원래 말이란 사회에서 합의된 기호 체계로, 당연히 구성원의 관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며 서로다른 언어가 완벽하게 1:1로 대응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정서적이고 압축적인 함의를 가진 단어가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은 원래 계약을 통해 맺어진 업무 관계를 냉정하게 설명하는 단어로서 정규직이라는 단어와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옳다. 이것은 업무 상 관계라는 단순한 사실관계를 설명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사회적인 문화 차이로, '비'라는 말은 그렇게 쓰이지도 않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적 태도가 시작되는 점이다.
실제로 차별은 일어나고 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일까, 실제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발생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차례 사회적인 문제로 가시화된 바 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혹은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보상을 받는 사례는 이미 수도 없이 보고되었고 고용 불안정이나 지위를 이용한 언어 폭력부터 심지어는 뇌물 수수나 성폭행과 같은 범죄로까지 이어진 사례도 많다. 단지 짧은 계약 기간으로 협력적 관계로 존중되어야 할 상호 간의 관계가, 이상한 수직적 관계로 왜곡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기적인 계약직이 장기적인 계약 관계자에 비해서 낮은 지위를 갖는 것이 우리의 직업 환경 고유의 독특한 특성인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러한 문제는 모든 비정규직에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의 정의나 계약 형태를 놓고 봤을 때, 이사급 이상의 임원이나 간부들은 대체로 비정규직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누구도 임원을 비정규직이라고 차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 경우에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억압하는 경우도 흔하다. 특이한 것은 그 계약형태에도 불구하고 임원을 비정규직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특수하게 계약이라는 사실관계를 설명하는 경우 외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종합해보면, 사회적으로 흔히 말하는 비정규직은 계약 기간 차원의 표현이 아닌, 구직에 대한 압력과 생계에 대한 위협을 받는 일부 단기적이고 연속적인 계약직 노동자들로 특수하게 규정된다. 이 장황한 논리의 전개는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고자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단순히 계약 기간의 장단이나 고용 안정성 여부의 문제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문제의 본질은 강자와 약자, 다수자와 소수자의 문제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짚지 못하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다.
비정규직의 수를 줄이면 문제가 해결될까
현재 사회 전반적으로 비정규직을 줄이자, 혹은 없애자라는 이야기가 대두되고 있다. 우선 비정규직을 아예 없애는 일이 가능할까? 단기 형태의 계약직이 왜 생기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이 필요하다. 업체나 단체가 단기 계약직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대체로 정기 근무자의 일시적 손실(출산, 육아, 군복무, 병가 등)이나 업무 자체의 지속력이 떨어지는 경우(이벤트성 업무, 캠페인 등), 새로운 인재의 탐색(인턴쉽), 또는 단체의 주 업무 외의 보조적 업무 필요(프리랜서, 계약직), 관리 상의 필요(임원급 계약, 컨설팅) 등으로 정리된다. 즉, 비록 상기한 근거를 토대로 현재 일부 사례가 비정규직 제도를 더 저렴한 비용에 많은 노동력을 이용하는 악질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문제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단기 계약직은 아예 없앨 수는 없다. 위에 제시한 수요를 장기적인 계약으로 채우기엔 단체 입장에서 부담이 클 뿐더러, 일정 기간이 끝난 뒤엔 잉여 인력이 되어 낭비가 된다. 그렇다고 단기 계약직을 채우지 않고 남은 사람들만으로 해결하기엔 직원들의 부담이 커진다. 이러한 배경에서 단기 계약직은 아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면 줄이는 것은 어떨까? 사회 각계각층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당연히 전환되는 개개인은 만족할 것이다. 소수에 해당하던 사람들이, 다수에 편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기한 문제로 모두가 다수로 편입될 수는 없다. 공리주의적으로 양적인 행복이 늘었으니 좋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해결책이었는지를 물었을 때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존재한다. 소수자는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소수가 되어,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워질 수 있다.
문제는 또 있다. 그렇게 정규직에 편입된 인력이 그 단체나 업체의 성향, 업무, 기존 인적 자산과 잘 어울러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혜택'에 묻혀 잘 논의되지 않고 있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은 기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규직으로 어렵게 얻은 그 직장이 생각보다 잘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혜택을 받은 '수혜자'에게는 이런 사치스런 고민을 할 사회적인 합의가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부러움'을 받으며 버텨야 한다. 정규직으로 가득 채워진 노동 시장은 견고하게 안정되어 있고, 자신이 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다시 소수가 되어 튼튼한 정규직의 벽을 다시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수자와 소수자의 문제는 여전하다.
한편, 단체에서도 이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다. 비정규직에 대치되는 정규직의 특성상,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장기적인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관례로 자리잡고 있다. 이 때문에 누군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이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어도 이를 잘라내는 것이 어려워진다. 심지어 범죄에 가까운 식으로 일하거나 폭언을 일삼고 업무에 태만하다고 해도, 확실한 사실관계 없이는 가벼운 처벌조차 어렵다. 오히려 객관적인 자료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준비하고 남의 업적을 빼앗아 승승장구 한다고해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주변인들조차 암묵적으로 공유할 뿐, 묵인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그 사람을 그만두게 할 수 없는 바에야 공존해야 하는데, 건드려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위의 이유로 쉽게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 악행을 인지하면서도 줄을 타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거나, 피해를 받으면서 묵묵히 버티거나의 기로에서 말이다.
힘의 균형은 어느 점에 있는가
결국 문제의 근원은 약자이고 소수인 비정규직이 비교적 강자이고 다수인 정규직에 의해 압력을 받는 부분에서 생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위에 존재하는 관계는 오히려 소수인 비정규직에 의해 다수인 정규직이 압력을 받는 상황인데,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적다. 소수의 비정규직(임원)에게 반작용을 줄 수 있는 다수의 정규직(직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층에서의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는 다르다. 억압받는 소수의 반작용은 다수로 나눠지면서 미약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점을 되찾아야 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간의 힘의 균형도 그렇고,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힘의 균형도 그렇다. 단순히 개개인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을 넘어, 사회적인 권력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리로 보았을 때, 이것은 비정규직이 오히려 양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비정규직이 다수가 됨으로써 사회적인 힘을 갖고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다수가 된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고 시대에 역행하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증가는 나름대로 기대되는 여러 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다. 비정규직이 다수가 된 세상은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현저히 높아진 사회를 의미한다. 누구나 쉽게 그만둘 수 있고, 다시 쉽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다소 꿈같은 이야기지만, 한번 상상해보자.
1. 노동자의 측면
이 세상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과의 차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수에 해당하기 때문에, 업체는 비정규직의 의견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만약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업체가 있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그 곳에서 일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누구나 쉽게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불의에 타협하거나 버티기 싫은 상황을 마냥 참을 필요가 없다. 갑자기 노동자들을 잃으면 공백에 타격을 입는 것은 회사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의견은 존중된다. 모두가 적성을 찾아 이동하며, 평생 같은 일을 하기보다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기회가 많아진다. 경력관리가 중요해지는데, 업무 능력이 경력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신망을 잃은 리더들은 직원들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사내 정치 등의 비합리 행위가 줄어든다.
2. 고용자의 측면
비리 행위나 혼란을 일으키는 직원은 다른 직원의 이탈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직장 이동의 유연성이 높은 상태에서 문제가 있는 직원을 더이상 '정'이라는 이유로 감싸줄 필요가 없어진다. 재계약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과감히 잘라낼 수 있다.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문제가 있는 직원들을 둘 필요가 없어져 업무 효율이 올라간다. 또, 다양한 경험을 쌓고 온 노동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업체를 발전시킨다. 피고용자들은 더이상 울며 겨자먹기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닌, 정말 이 업체의 성향과 비전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다. 열정적인 참여가 최대한의 수익을 보장한다. 누군가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부담이 줄어든다. 공채, 합숙면접, 등산 같은 비정상적인 채용방법 대신 같이 일해보면서 서로 호흡을 맞추는 방법이 선호된다. 적은 비용으로 더 좋은 인재를 채용할 수 있다.
누가 진짜 정규직인가?
이상적인 상상이지만, 확실한 것은 '고용 안정성'이나 '정규직'과 같은 단어가 긍정적으로 보이는 어감과 달리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정규직 노동자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많은 이들은 단지 장기적인 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 직원이라 업체 쪽에서 다소 챙겨준다는 부분이 있을 뿐, 비정규직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 계약을 해지하는 게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울 뿐, 정규직 노동자들도 결국 현재 상황에서는 상대적 우위에 있는 노동자에 불과하다. 이미 많은 사례를 통해서 절차적으로 복잡하고 교묘한 방법을 쓰느라 고생을 했을 뿐, 해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정규직 노동자들은 등장해왔다. 소수가 된 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해보려 하기도 했지만, 힘이 없어진 상태에선 무의미했다.
안정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불안정한 상태를 두려워하고, 그 상태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수많은 개인들이 제한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상태와 같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서로를 구분짓고, 차별하는 근거가 되어왔다. 그러나 만약 어떤 정규직 직원이 급작스런 병이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안정적인 벽 밖에 서게 된다면, 그리고 그 자리를 어느 비정규직 직원이 차지하게 된다면 이 둘을 어느 하루의 분초 단위로 갑자기 다른 인물로 정의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결국 모두 비정규직이다.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짧게 관계를 맺는 고용-피고용의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피고용자의 노동에 의한 혜택을 가장 많이 보는 것은 고용인이다. 뽑아주셔서 감사한 관계가 아니라, 일해주셔서 고마운 관계가 되어야 고용으로 인한 많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