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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진 Jun 07. 2017

창작이 자라는 땅

창작의 토양은 정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권문세족은 많은 땅을 소유하고 권세를 부렸다. (http://www.chaovietnam.co.kr/archives/17605)


고려 말의 한반도는 훗날 권문세족이라고 통칭되는 권세가들에게 다수의 토지가 지배당하는 구조로 돌아갔다. 그들은 강과 산을 경계로 할 만큼 넓은 땅을 소유한 상태로, '수조권'이라 불리는 권리를 활용해 조세를 거둬들여 자신의 재산으로 삼았다. 땅을 일궈 농작물을 거둔 것은 소작농이었으되 그 혜택을 누린 것은 이들 권문세족이었고, 이는 지배층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반감으로 이어졌다. 고려라는 국가가 기울게 된 배경이었다.




위의 일화가 오랜 역사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단어 몇 개만 바꿔보면 오늘날 우리사회와 묘하게 닮아있다. 사회의 발전과 사회제도의 개선으로 겉으로 보기엔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여전히 땅을 소유한 이들과 그 땅을 활용하는 이들은 분리되어 있다.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본가와 생산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물론,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자신의 역량, 노력이나 기회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자본을 획득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자본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는 일부 행태는 잘못이다. 불법적인 경로나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얻어낸 것이 아닌 한은, 자본에 대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이는 극단적인 사회주의로 전도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인가? 그 전에 먼저 '땅'이라는 자산, 또는 재화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땅을 우리는 흔히 '부동산'이라고 한다. 즉,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다. 빙하기 또는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거나 북한 정권 수립이나 Area 51 과 같은 사회적 이슈의 발생으로 인해 지역이 특수한 목적으로 제한되지 않는 한, 땅은 움직이지 않는 자산으로 기능한다. 다른 자산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변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땅은 특별한 이유 없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동산이다.


때문에 우리는 땅을 아주 특별한 재산으로 취급한다. 요즘 플랫폼(platform)이라는 단어를 곳곳에서 많이 쓰는데, 땅은 그 자체로 이미 플랫폼이다. 자자손손 대대로 가지고 있어도 변하지 않고 그 위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의 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산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자본을 가지고 있는 누구라도 땅을 소유하고 싶어할 만 하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땅은 점유되어 왔다. 자본을 가진 누구라도 땅을 가지고 싶어하고, 땅을 가진 누구도 다시 내어놓고 싶은 사람들은 없다. 세금과 같은 사회적 장치가 없었다면, 이 나라는 지금쯤 부동산을 거래한다는 것이 거의 정지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땅이 소유되었고, 그 소유한 모두는 아무도 땅을 팔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현재 시점에서도 땅을 가진다는 것은 꽤 많은 재산을 털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생산자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나라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현상은 그다지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매일매일 직접 경험하고 있듯이, 개인의 단위에서부터 생산(소득)과 비용(지출)의 측면에서 봤을 때 생산이 더 크지 않으면 자산의 감소(적자)가 발생하고 그것이 오래 이어지면 파산(부도)한다. 따라서 생산은 중요하다.


예전에 우리 사회의 생산은 농업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업 중심으로 흘러갔던 이전 사회에서도 농업인들이 직접 경작할 토지를 소유하고 경영하던 국가의 초기에는 나라에 활력이 넘치고 문화가 꽃피었지만, 세도가에게 농지를 빼앗긴 국가 말기에는 나라 전체가 힘을 잃었고 삶의 질은 바닥을 쳤다. 오늘날 이 땅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 산업들은 농업 외에 다양한 산업으로 발전했다. 각종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문화 콘텐츠 사업, 예술 등 다양한 산업이 이 땅에서 생산된다. 즉, 과거의 농업 중심적인 산업 구조가 체질적인 변화를 통해 다양한 산업으로 분화된 것이다.


산업의 분야와 형태는 달라졌으되, 이들 역시도 여전히 생산의 장(場)은 필요하다. 제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서비스업도 모여서 회의를 하고 서버를 구축하고 서비스의 중추 역할을 할 공간은 항상 필요로 한다. 아이돌은 춤과 노래 연습을 할 공간이 필요하고 만화를 그리거나 작곡을 하거나, 설치미술 작업을 하는데도 모두 그 활동의 장은 필요하다.


때문에 이 땅의 많은 생산자들은, 예전의 조상님들이 그러했듯이 플랫폼을 자본가들로부터 빌리고, 그 댓가를 일정한 시기마다 지불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산자에겐 꽤 큰 부담이 된다. 생산활동에는 그 비용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간다. 그 단편적인 예로 소비자가격이 올라가는 부분도 있다. 물론 올라간 가격은 생산자에게 혜택을 주지는 못한다. 생산자는 원래 자신이 얻을 정도의 소득 정도를 얻고, 올라간 비용은 생산의 장을 제공한 플랫폼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결국 땅을 가진 사람은 원래부터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를 통해 더 '가진 사람'이 되는, 이른바 '돈이 돈을 낳는' 경지로 들어선다. 이는 자본주의 자체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규모의 경제, 자본을 통해 다시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생산자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은 반면, 생산자에게 땅을 제공한 자본가는 소위 '불로소득'이라고까지 불리는 소득을 얻게 된다.





자본의 대여는 사회적 생산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 문제는 '자본주의란 원래 그런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되는 것이,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생산자는 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생산자의 생산활동은 사회의 생계를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돈벌이'이다.


반면, 자본을 생산자에게 빌려주고 그 비용을 받는 것은 비록 개인이나 가계의 입장에서는 생계에 도움을 주는 직접적인 수익수단이 될 수 있을지라도, 우리 사회 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못하다. 그 비용은 내수 경기 안에서 흐름으로써 활기를 줄 수는 있지만, 사회의 재화를 새롭게 생산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해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많은 자본을 가진 자본가들이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치금을 일정 수준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즉,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은 사회적으로 지난 글 "서울을 누가 이렇게 높이 쌓았나"에서 언급한 '독'과 같이 재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환원하는 양이 현저히 적은데, 이렇게 되면 자본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시각에서 중요도를 따진다면 당연히 생산자의 생산활동이 자본가의 대여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로 더 '잘 사는'것은 자본가이다. 이 모순이 이상한 결말을 만든다. 모두는 자본가가 되는 미래를 꿈꾸며, 심지어 현재의 생산자들도 생산활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종착지는 '땅 주인'이 되어 대여를 통해 자본을 획득하는 것인 경우가 많다. 생산활동 자체를 통해 자신의 이상과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라는 것은, 안타깝게도 이 환경 속에선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도 분명히 이야기했듯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지하고 있듯이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의 "한계"이다. 그리고 한계라는 것은 언제나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쳐야 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치지 못하면, 사회는 생산에 대한 에너지와 열망 등을 잃게되고 이는 사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수순으로 연결된다. 개인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대화되면 파산하듯이, 사회도 파산을 겪는다. 우리는 이미 1997년도에 이러한 일을 겪었다. 다시 그 슬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무분별한 토지 소유는 자제되어야 한다.



자유주의 / 자본주의 체제에서 무언가를 제한하고 개입하여 강제한다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한계를 고치기 위한 최소의 장치는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 사회는 '수정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많은 제도적인 보완을 해왔고, 앞으로도 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사회적인 의식이 발전해 제도적인 제한 없이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가장 좋다. 제도와 법규는 언제나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고친다고 해도 빈틈은 있고, A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설된 법규가 B라는 문제를 낳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개인이 조금씩 욕심을 줄이고 제한된 파이를 잘라먹는 것보다 파이 전체를 키울 생각을 하게 된다면 가장 이상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현대의 시점에서 오늘날까지, 아니, 사실은 현대 이전의 시점에도 많은 토지를 가지고 그 임대 수익을 얻고 있다는 것은 부의 상징이요,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세계적으로도 고금을 막론하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날 우리 사회에서부터라도 뭔가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부끄러운 일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인식을 바꾼다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불과 한 세대 정도를 지나면 많은 것들이 바뀐다. 인종차별, 성적 소수자,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 이혼에 대한 관념 등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길게는 백여년, 짧게는 몇 십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 사회적인 위기의식이 세워지고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금방 바뀔 수 있다. 


수많은 땅을 가지고 세를 누리던 권문세족이 현대에 와서 비판을 받듯이, 분명히 이러한 행태는 사회적으로 득이 되지 않으며, 냉정한 비판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실제로 그러한 사람을 보면 우리는 부러워하고, 이들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의식은 바뀌어야 한다. 무분별하게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지양하는 시민의식이 발전한다면, 어떠한 부동산 정책보다 효과적으로 부동산을 안정시키고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땅을 활용하는 방향을 인도할 것이다.




생산할 수 없는 비용을 요구하지 않게 되기를



어떤 일정한 면적의 토지에서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그 한정된 재화 이상의 비용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처음에 무리해서 그 토지를 이용하던 소비자들은 점차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홍대 앞 거리나 이태원 경리단길 등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가 발생한 지역들은 처음엔 분명히 생산적인 지역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소비적인 지역이 되어 있다. 그 지역이 요구하는 지대(地代)가 이미 그 지역에서 생산할 수 있는 재화를 넘어섰기 때문에 생산자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생산자 개인 또는 단체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생산자 집단이 사라진 곳에는 고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소비자인, 대기업 계열의 가맹점들이 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다양한 생산자가 사라지고,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어느 기업의 일면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 종(種)의 소멸은 사회적으로 봤을 때 생산자 개체가 사라지는 것 이상의 충격을 가져온다.


예술, 음악, 디자인 등 창작은 서로의 영감을 받으며 자라난다. 하나의 창작은 그 창작물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창작물을 감상한 감상자의 일정 비율이 다시 새로운 창작을 낳도록 하는 기하급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창작과 감상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환경에서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창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본이 우선되는 사회에서는 위의 선순환 구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단순히 자본을 가진 사람이 '스웨그 (Swag)'를 가지게 되는 세상에서는 우리 모두가 '돈 되는' 문화만을 고집하게 되며, 문화의 토양을 건강하게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이렇게 획일화된 생태계는 언제나 위험하다.


어떤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비싸게 땅을 불려서 팔았는지가 어떤 사람의 능력이 되는 현재에서 발전하여 어떤 생산자를 후원하고 있는지, 내가 가진 것들을 그들에게 투자하여 얼마나 좋은 창작물을 만들어냈는지가 진짜 '스웨그'가 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이러한 인식과 의식의 변화는 제도적인 개혁보다 훨씬 강력하며, 지속력도 강하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멋있을 것이다. 지은 건물에 스타벅스를 입점시켜서 30억의 차익을 올리는 것보다, 어딘가 남다른, 가능성 있어보이는 창작자에게 믿고 맡긴 허름한 창고에서 '스타크래프트'가 나오거나 그 사람이 '스티브 잡스'가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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