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옥잠. 오랫동안 점찍어두고는 언젠가 시간이 나면 가야지 마음먹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짐을 풀고, 느릿느릿 시골길을 걷고, 강변 따라 자전거를 타고,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읽고 싶었다. 그곳에서 가고 싶은 곳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다른 생각 접고, 그저 읽을 책 두 권만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 읽지 못하더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저 책을 읽는 시간의 여유가 넉넉한 여행이고 싶었다. 한참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들고 싶었다. 다시 일어나서 한 장 두 장 넘겨보다가 캄캄한 밤하늘 아래를 잠시 거닐고도 싶었다.
감자와 백일홍이 자라던 뒤뜰
슴슴하기보다 심심했지만 보기에는 좋았던 재첩국수
혼자가 좋으면서도 혼자가 어색해지는 순간이 여행 중에 갑자기 찾아오곤 한다. 밥 먹을 때 특히 그렇다.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한 식당에 가고 싶을 때나 줄 서서 먹어야 하는 맛집으로 불리는 식당에서 두 자리를 혼자 차지해야 할 때 괜히 부끄러웠다. 평소라면 주저했을 텐데, 이번엔 조금의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얼마나 대단한 용기이겠냐만은, 맛있는 음식을 혼자서도 충분히 누리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종내 재첩국수와 메밀전병을 사진으로 담아낸 후 천천히 맛을 보았고, 돼지 족탕 2인분을 시켜놓고는 소주 한 잔에 부들부들한 족발 하나를 들고 뜯었다. 맛있다고 바로 말을 건넬 사람, 신나게 소주잔을 부딪을 순간이 없어도 좋았다. 펄펄 끓는 족탕 국물 한 숟갈이 피곤한 몸을 덥히는 느낌을 눈 감고 가만히 즐길 수 있었고, 허름한 식당 안 메뉴판, 장식품, 삼삼오오 앉아있는 손님들을 풍경처럼 잔잔하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잠시 멈춰 그늘에 앉아 다리쉬임하는 여행이고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구례옥잠의 뒤뜰에 앉아 책을 읽었다. 혼자 밥을 먹었고, 술 한잔을 걸쳤다. 시골길을 한참이나 걸었고, 강변 따라 자전거를 탔다. 그러다 문득 그날의 순간을 남기고 싶어 아주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다이어리 한켠에 마련된 한정된 공간에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썼고,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매일은 어렵겠지만, 여행과 여행 같은 일상에서 어떤 시간들을 기록해두는 것이 소중하겠구나 싶었다.
핸드드립 커피 '봄'과 책 <평일도 인생이니까>를 옆에 두고
구례옥잠 뒤뜰 담벼락 위로 보이던 풍경
2020.05.03.日
먼 길을 달려 구례에 왔다. 기다렸다는 듯 비가 왔고, 다행히 차 안에 우산이 있었다. 기대했던 재첩국수는 맛이 없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푸르렀다. 숙소에는 뒤뜰이 있었고, 가로등이 독서등이 되어주었다. 적당히 선선했고 소리 없는 비는 가로등 불빛에서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선물 받은 드립커피 '봄'과 함께 책(<평일도 인생이니까>, 김신지)을 폈다. 이따금씩 사진을 찍으면서 한 챕터를 다 읽었다. 책을 덮고 빗물 가득 머금은 푸른 이파리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오늘을, 오월을, 이천이십 년을, 서른넷을, 구례에서의 삼일을, 이 밤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의미를 붙여보고 싶었다. 사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일기를 끄적여 보았다.
2020.05.04.月
새벽녘에 눈이 뜨였다. 다섯 시쯤이었나. 좀 더 자 두어야겠다 싶어 눈 감았다 뜨니 일곱 시였다. 게스트하우스에 준비된 빵, 살라미, 치즈 그리고 계란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씻고 난 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길에 올랐다. 쌍산재까지 도보로 한 시간. 걷는 내내 부는 바람이 꽤나 셌고, 비 오던 어제가 무색하게 조금 더웠고, 하늘은 맑았다. 쌍산재 가장 깊숙한 한옥 마루 한 켠에 걸터앉아 진한 매실차를 마시며 책(<소년이 온다>, 한강)을 읽었다. 다시, 간만큼의 길을 걸어 숙소 근처로 와서 목월빵집의 빵을 샀다. (점심 먹을 곳을 찾아) 한참을 돌고 돌아 (다녔으나 결국) 아무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해결했다. 숙소로 돌아와 끈적이는 몸을 씻어내고는 자전거를 탔다. 내 몸에 맞지 않아 조금 위태했지만 길과 강과 하늘과 나무는 푸르고 예뻤다. 퍼져버린 몸으로 돌아와 (동아식당에 들러) 족탕과 소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들었다. (저녁 아홉 시쯤이었으려나) 다시 깨서 거울 보니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여름이구나 싶었다.
섬진강이 드넓게 흐르던 길 따라 자전거로
생각보다 뜨겁던 햇살 아래 자전거 타다 잠시 다리쉬임하다가
2020.05.05.火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월요일 휴무라 가지 못한 부부식당의 다슬기수제비를 먹기 위해 아침 빵을 적게 먹었다. 씻고 방 정리를 한 뒤 뒤뜰에 앉았다. 집주인 아저씨가 백일홍 모종을 가져와 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잎이 높게 올라온 건 감자라 했다. 뒤뜰에 이것저것 심어놓고 싹 올라오는 것 보는 즐거움으로 산다는 집주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낮이라 그런지 (밤에는 보지 못했던) 벌레가 많이 보인다. 평소엔 징그러웠던 것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다. 꽤 오래 앉아 책을 읽었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읽던 책을 덮고는) 짐 챙겨서 나오다가 방명록이 눈에 들어왔다. 또 오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기고 구례옥잠을 나왔다. 오픈 시간 맞춰 달려간 식당의 다슬기수제비는 맛있었고, 남김없이 비워냈다. 담백하고 시원했다.
풍경이 있는 구례옥잠 앞 뜰 전경
방명록에 끄적이는 편지
한참 걸었던 길, 자전거 타며 지나치던 풍경 또한 벌써 온 여름의 좋은 순간들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