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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Jun 02. 2024

성북동 파브르

chap. 3 발록을 물리친 회색의 마법사 간달프

 반지 원정대 중 간달프는 드워프들이 깊이 굴을 파다 깨운 발록을 상대하기 위해 지팡이로 다리를 끊는다.

 "You shall not pass!"

장렬히 전사한 간달프는 백색의 마법사로 업그레이드되어 두 개의 탑을  돌아온다.

나는 장렬히 전사하는 아노르의 불꽃의 지배자 간달프 대신, 하얀 가루약을 든 데카메트린의 사도로 오늘 외벽과 마당 사이 결계를 치려 한다.

 

3번 살충제

백색의 가루약

성분:테카메트린 (델타메트린과 동일하다고 함, 지난 포스팅 1번 살충제와 동일한 성분)

위해해충 및 쥐의 구제를 위한 방역 소독 실시 지침에 따라 사용한다.

대상해충- 바퀴벌레 지네 :서식장소나 잘 지나다니는 통로에 살포


취급 시 주의사항

적정한 보호복과 장갑을 착용할 것

불쾌감을 느끼면 의사의 검진을 받을 것

환경에 배출을 피할 것


이 약은 유제보다 좀 독한가?  주의 사항이 조금 더 화려하고 구체적이다. 절지류의 박멸을 위해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카페글이나 블로그글을 유심히 검색해 봤는데 대부분이 광고였으나 한 카페 게시물의 댓글을 보고 구매했다.

 -단독주택 살고 있는데 지네 때문에 머리가 빠개져 버릴 것 같아요-

 "네, 선생님. 저도요!!"

원룸과 오피스텔 생활만 해온 무지렁이는 '주택은 벌레가 많다'에 날파리, 끽해야 바퀴벌레, 여름철엔 아디다스 모기를 생각했지, 이렇게 다양한 놈들의 먹이사슬의 생생한 현장 속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구나무서서 봐도 취급주의 해야 할 것 같은 빨갛고 노란 색상의 띠를 두른 하얀 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제품을 사용할 때는 음식물을 먹거나 흡연을 해서는 안된다.'

'작업을 실시한 후 노출된 피부는 반드시 세척해야 하며 가급적 목욕을 해야 한다.'


 판매자가 부착해 둔 테이프를 뜯고 뚜껑을 딴 뒤 마당으로 진격한다.

 마당과 외벽 사이, 현관문 앞 계단에 솔솔솔솔 도포했다. 마스크를 끼고 작업하려고 꺼내놓고 쌩으로 작업하며 날리는 가루를 아주 소량 흡입하고 나서야 식탁에 두고 온 꽃분홍색 마스크가 떠오른다.

 이미  늦었다.


취급주의사항:

불편함을 느끼면 반드시 의사에게 진찰받을 것


 불안한 것인지 불편한 것인지 모르겠다.

날이 좋아 작업이 끝나면  레몬라들러 한 캔 하려고 했는데 알바생이 화장실에 갔는지 편의점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그냥 돌아온 참이었다.

 작업 중에 라들러를 안 마시게 되어 다행인가? 혹시 갑작스런 극심한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가게 된다면 이 경사진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가야 하려나?

 잠시 살포를 중단하고 살충제를 뿌리지 않은 방향으로 가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보, 이미 공기 중에 떠다닐 텐데'

 1년에 며칠 안 되는 날씨를 보고 레몬라들러를 떠올린다. 마당에서 맥주 한잔, 티 타임, 고기를 구워 먹는 삶은 아주아주 부지런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었고, 누리는 시간에 비해 준비하고 관리하는 시간은 곱절이 드는 것이었다.  

 현재로서는 해충박멸과 청소만으로 벅차다. 마당에 평상이나 데크를 두고 좀 지내볼까 했지만 습한 나무는 지네가 아주 사랑하는 공간이라 놈들의 서식지로 탈바꿈 될 것이다.


 한 번에 대량을 살포하는 것보다 주기적으로 소량을 살포하는 게 효과가 좋을 것 같아 빙의자의 침대 주변에 소금원을 그리는 것보다는 적은 양을 뿌리고,  현관문 앞에는 결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외벽보다 도톰하게 뿌렸다.  

 '이렇게 마당과 외벽 사이, 현관문 틈에 사용하는 용도가 아니면 어쩌지? 락스를 세제와 섞어 쓰면 안 되는 것처럼, 혹시 이거 나만 모르는 건가?'

 역시 다 뿌리고 뒷북이다. 나란 년!


 라들러를 사려다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짜부되어도 왕지네로 보이는 녀석이 자동차에 깔려 죽어있었다.

 '아, 우리 집에 나온 녀석이 지네가 아닐 수도 있겠다.'

 희망사항일 수도 있다.

매주 토요일 경건한 마음으로 퇴치 의식을 진행할 것이다. 매주 살충제를 뿌리다 쓰러진 여자의 뉴스가 나오지 않는다면.



 내놓은 분리수거가 사라지면 기쁘고 해가 난 마당에서 살충제를 도포하는 게 뿌듯한 일상, 몸이 바빠지니 사는 게 조금은 단순해진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마당청소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각종 살충제에도 불구하고 유종의 미도 거두지 못한 채  겨울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자려고 누우니 벌써부터 장마철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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