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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Nov 25. 2022

있잖아

왜 말을 하다가

 그는 한결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에 너무나도 강렬해서 잊을 수 없는 향수를 머리가 아플 정도로 뿌리고 다녔고,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 전화가 울리곤 했습니다. 그러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혼자 걸어갔습니다.

 “중요한 전화라.”

 하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나 까먹을 즈음이면 그는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요. 그리고는 긴 통화음 끝에 음성 사서함으로 이어지는 목소리나 시간이 되면 툭 꺼지는 핸드폰 액정처럼, 그는 내가 말하기 전까지 엄한 곳만 바라봤습니다. 어서 말을 걸어봐, 얼마나 중요한 사람과 대단한 이야기를 했을지 어서 물어보란 말이야, 외치는 듯 언짢은 표정과 침묵만 우리 사이에 오갔습니다.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도 말을 잇지 않았기에 결국 저는 그에게 무슨 전화를 하고 왔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꽤 오래 만난 형님인데 사업하다가 물어볼 게 좀 있다더라고. 한창 잘 나갔는데 요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서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는 거 있지. 돈 받고 해줘야 하는 건데 일단 너랑 만나고 있어서 엄청 간단하게만 말해줬어. 나중에 술 사준다고 언제 한번 보자 하더라.”

 사업을 하고 있다거나 공부하고 있다며 그 자신에 대한 것은 얼버무리는 것과 사뭇 상반된 모습이었습니다. 의심이 가던 때도 있었으나 옷차림이나 돈 씀씀이를 보면 분명 능력이 있을 터였고, 저는 사람을 잘 믿어서 그 말을 그대로 들었습니다. 믿었다 보다는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만날 때마다 적당한 선물을 사주거나 제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 또한 한몫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새빨간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와서는 사랑한다며 건네었습니다. 애정 표현에 서툴거나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막상 앞에서 듣고 있으면 낯간지러운, 그런 것은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시들어서 버릴 것을.

 “그래도 사 왔으니 받아.”

 연한 하늘색 포장지에 노란 끈과 뜨거울 정도로 붉은 장미, 사이에 끼어있는 안개꽃처럼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그 순간을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요. 그날 저는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탁자에 늘씬한 화병을 놨습니다. 그를 만나기 한참 전에 선물로 받은 것이었지요. 나름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순간 내보인 표정만이 아니라 그가 준 선물이 이토록 좋았던 것이 처음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성실히 물을 갈아주며 꽂아두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 사이에 꽃은 썩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꽃은 열매를 위한 약속이며 모든 꽃잎을 떨어트려야만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바퀴처럼 굴러가는 시간 속에서 때가 되면 만났습니다. 대부분은 그가 먼저 연락을 해왔고 하루나 이틀이 지나서 만났는데,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습관일 뿐이었습니다. 다분히 인간적인 그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바쁘지만 아무것도 없으며 중요하지만 텅 비었으며 서툴고 위험하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 모습. 그것마저 한결같았고 저도 따라서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죠.

 “혹시 모르니까.”

 그는 그렇게 포장하곤 했습니다. 사실 서로에게 캐묻지 않으며 티조차 내지 않기로 한 관계였지만 저는 내심 기분이 좋았습니다.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 또한 그에게는 비밀이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계산적이다 못해 치밀한 그에게 놀아난 적이 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꽃이 시들고 일주일이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문제가 생겨서 전문가인 경아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치킨도 마침 도착했기에 상을 차리며 요즘 이렇고 저랬다는 둥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꽃다발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죠.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다. 딱 봐도 뻔한 사람인데 홀려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휴.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편하다고 내가 말했잖아.”

 경아는 제가 순수함을 아득히 넘어 멍청한 수준이니 항상 조심하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것이 관계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고 다만, 너무 빠지지 말라는 뜻임을 저는 잘 알았습니다. 경아가 저보다 더했으니까요. 5년 전인가, 한 남자를 만나면서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자신이 ‘폴리아모리’라며 반쯤 취한 것 같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미래적이고 자유로운 사랑! 순진하면 당한다거나 일단 숨기면 좋다, 저처럼 어린양을 구원해주는 것이 경험자인 자신의 책무가 아니겠느냐며 동갑인데도 언니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모습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녀는 신실하다 못해 완벽한 ‘교회 누나’였으며 일요일마다 티스푼의 반만큼 자신의 죄를 덜고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 몸을 부르셨나?”

 경아는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또 꺼내오며 말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말하려 했는데 눈치 빠른 그녀 앞에서 더 이상 숨기지도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저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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