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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Mar 17. 2023

상자 속에 담긴 것은

 짐을 옮기고 꼬박 하루를 끙끙 앓으며 누워있었다.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니니 아버지는 어떠실까 하는 마음에 그저 가만히 계시라고, 도와주다가 다치시느니 내가 다 하겠다고. 그게 오산이었다. 베란다와 거실 구석에 가득 찬 짐은 안방이 비질 않아서 처리할 수도 없었다.

 “며칠 동안만 손주 방에서...”

 말 못 할 죄를 지어서 우물거리는 아이 마냥 말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래왔다. 열이 조금 나고 온몸이 묵직하며 손목과 허리가 쑤시길래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몸살감기약을 먹고 자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황소가 없으니 당신이 그 고집으로 사쇼?”

 어머니는 그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남의 밭에서 감을 하나 따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회초리를 들지 않으니 오죽 답답해서 그랬을까. 아무리 화가 나고 혼낼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때리지 않는 게 아버지의 고집이자 신념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서 그런 생각을, 그것도 그 당시에 가졌으니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잘못을 했으면 알려줘야지 그걸 때린다 해서 말을 듣나, 이 사람아. 애가 어리면 어르고 달래서 가르켜야지.”

 그러면 어머니는 말없이 하던 일만 하셨다. 바짝 말라서 반짝일 정도로 하얀 마늘 껍질이 폴폴 휘날리거나 고구마순 섬유질이 지익- 소리가 보일 정도로 찢기고, 파뿌리가 아니라 머리 채로 뎅강 떨어져 나가는, 뭐 그런 식. 가리키고 가르치는 문제는 당신들 사이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멀뚱히 그 대화 사이에서 대봉 하나를 들고 서 있으면 아버지는 거기에 밤 몇 알을 챙겨 와서 가자고 했다.

 “가서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거다, 자.”

 일곱 살 아이 손에 감 하나도 큰데 거기에 턱 얹힌 밤이 떨어질까 나는 손을 가슴으로 당겨 들었다. 그늘에 있었는지 밤은 쇳덩이처럼 차갑고 묵직했다. 아버지는 내 뒤를 따라 발맞춰 걸으셨고, 십 분 남짓 걸어가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묵묵히 걸었다. 해가 떨어지는 와중이라 점점 길어지는 그림자로 아버지가 따라오고 있음을 알았다. 밭과 논 몇 마지기를 지나고 대로를 건너 도착한 집, 막상 감나무 주인은 우리를 보고서 “하나는 괜찮다”라고 돌려보냈다. 제법 잘 사는 집이라서 그랬으려나, 당시에도 먼지를 뒤집어쓴 아버지와 코를 훌쩍이며 울기 직전인 내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해가 사라지고도 밝을 즈음에 집으로 향했으므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일이 문득 쑤시는 팔뚝처럼 떠올랐다.     


 잠에서 깬 건 늦은 아침이었다. 거실서부터 덜그럭거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손목에는 파스가 한껏 울게 붙어 있었다. 그래, 새벽 잠결에 끙끙대며 화장실을 다녀올 즈음 아버지가 파스를 들고 안방으로 왔다. 아직은 시원하니 조금 있다가 떼자,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시골과 노인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확 덮쳐왔다. 상자에 함께 담겨온 모양이었다.

 “아버지, 아침은? 일찍 일어나셨네?”

 늙으면 아침잠만 없는 게 아니라 입맛도 별로 없다고, 아버지는 가위 한 날을 칼처럼 쥐고 테이프를 가르며 말했다. 조심스레 열고 뒤적이다가 다른 상자를 여는 모습이 무언가 찾는 듯했다. 거실로 들이치는 햇빛에 솟아오르는 먼지와 짧아서 더없이 보이는 백발이 반짝였다. 하나 열 때마다 오래된 냄새가 더 짙어졌다.

 “뭐 찾으세요?”

 머리 긁적이던 손으로 냄새를 휘저으며 아버지 옆에 가 쭈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고구마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상자 안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책들과 작은 함 하나가, 그 옆에 우체국 상자는 수저 젓가락과 접시가 가득했다. 앙증맞은 티스푼과 포크 세트, 결혼하기 직전에 사드린 것도 수저통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감자인지 양파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자 속에서 아버지는 성경을 꺼냈다. 너덜너덜하다 못해 갈라지고 있는 갈색 표지는 무슨 사전만큼이나 두툼했다.

 “아버지, 교회 다녔었어요? 이게 다 뭐예요, 세상에.”

 거의 뺏어 들듯 그것을 낚아챘다. 나이 먹은 노인네들 꾀어서 있는 돈 없는 돈 빼간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더니 이내 생각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종교든 다단계든 외로운 사람을 홀리기 마련이라는데 아버지 홀로 있던 시간도 적지 않았으니까. 시골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한들 5년이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절대 바뀌지 않을 그곳에 공단이 들어선다며 땅을 팔고 아버지가 올라온 것도 그렇지 않던가. 더군다나 아버지라면 오히려 말하지 않을 터였다. 혹시라도 그런 것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그 고집을 내가 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딘지 모를 미안함과 불안 속에 상자를 내 앞으로 끌고 와서 안을 뒤졌다.

 “뭘 그리 뺏어가냐,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아버지는 의심의 원흉을, 당신 손만큼 마르고 갈라진 그 표지를 쓸어내렸다. 쌓인 먼지가 훅 하고 번졌다. 상자 안에는 작은 수첩들과 가계부, 파스 한 무더기와 잡동사니가 전부였다. 대수롭지 않은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매만졌다. 사부작거리는 파스 주름과 너저분하게 들리는 끄트머리가 손에 걸렸다.

 “교회 다닌다고 한 번도 말한 적 없잖아요. 사람 속여먹을지도 모르고. 요즘 세상에 그런 식으로 사람 꾀어내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다 뱉고 나서야 너무 쏘아붙였나. 아버지 얼굴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자주 찾아가지 않아서, 혼자 있을 당신을 생각해 볼 겨를이 없어서, 속으로 되뇌었다. 앞에 가만히, 성경을 내려놓은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햇빛을 받은 먼지가 바람 한 점 없는 거실에서 한참 떠돌다가 가라앉을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입을 달싹이려던 찰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화가 왔다.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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