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짜장면? 아니면 짬뽕?”
휴학하고 잠깐 쉬고 싶다는 아들 전화를 마치자 뒤늦은 허기가 밀려왔다. 전화가 고됐는지 아버지의 짐이 잔뜩 남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요즘은 취업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는 같이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지만 자기 원하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성인이니, 휴학이고 뭐고 가로막을 이유가 없었다. 할 수 없거니와 해서도 안되고. 그러나 우물거리다가 할 말만 하고 바로 끊어버리는 무뚝뚝함이나 어색함 때문일까. 아들과 이야기를 다 하고 나면 봄날 같은 부드러움보다 늦가을에 바닥을 쓰는 바람이 부는 듯했다. 애초부터 화목한 집과 거리가 있었지만 이럴 때면 더더욱 그랬다.
“짜장.”
아버지는 열린 상자를 앞에 두고 베란다 창밖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얼마 전에 다시 칠해서 선명한 아파트 옆 동의 외벽이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반짝였다. 내 눈에 보이는 그 벽을 보는지, 아니면 미세먼지가 뿌옇게 낀 먼 산자락을 바라보는지 알 수는 없었다. 주문하고 40분 정도 걸린다네요, 말할 때까지도 아버지는 가만히 있었다. 지금 상황이, 그보다 내게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성경 하나만 보고 당신에게는 별일 없던 것임에도 쏘아붙였으니. 나 같아도 그럴 터였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겠다. 오래된 맥주처럼 밍밍해진 나는 안방을 정리하겠다고 돌아섰다. 그래, 아버지나 아들이나 내가 무어라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 교회 드나든다고 해서 다 사기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점심이 도착해서 나가자 거실에는 아버지 짐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탁한 하늘색에 무거운 그릇들과 작은 냄비가 식탁을 차지했고, 오래된 책이며 라벨이 다 벗겨진 약통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나를 열어보니 작고 하얀 정체불명의 약이 절반 정도 차 있었다. 반대편에 밀어둔 상자에는 옷이 가득 들어있고 어디에 들어있었는지 올라오면서는 보지 못했던 화분들도 베란다에 나와 있었다.
내가 작은 상을 차릴 동안에도 아버지는 상자에서 짐을 하나씩 꺼내서 한참 들여다보다가 내려놨다. 그 움직임은 봄이라며 작은 풀이 올라오는 것처럼 느리지만 또 분명했다. 어쩌면 당신이 챙겨 온 물건들은 그 자체보다 더 긴 세월이 담긴 것들이었으니, 시간을 정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벽에 붙여서 차곡히 늘어선 화분들 중에는 옹기처럼 윤기 나는 화분에 다육식물이나 새하얀 사각 화분에 심어진 선인장, 작은 팻말과 동그란 돌멩이로 꾸며진 것도 있었다.
“저런 화분도 있었어요?”
랩을 뜯으며 물었다. 탕수육 기름 냄새가 진하게 퍼지는 동안 아버지는 오래됐다고만 하며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오히려 그 말뿐이라 아버지답지 않다느니 누구한테 받은 건 아니냐는 말을 꾹 깔고 앉아야 했다. 바닥이 유난히도 차갑고 딱딱했다. 괜히 두리번거리다가 먹먹하게 꺼진 텔레비전이 보였다. 그래, 며칠 전에는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접근해 말벗이 되어주는 척하면서 돈을 빌려가더니 이내 도망가는 사람이 잡혔다고 했다. 사람 없는 동네에 슬렁슬렁 걸어가서는 집을 털어간다는 도둑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요리조리 피해 다녀서 전과가 꽤 많다고도 했다. 이상한 신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야구모자에 후드를 푹 눌러쓴 범인이 떠올랐다. 음성변조와 모자이크와 거무튀튀한 모습들. 그 사이에 아버지 혼자 살았던 시간, 상자에서 튀어나온 성경이 뒤섞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끌어다가 걱정해 봐야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지만 끈적한 불안은 으레 들러붙기 마련이라고. 동네에 교회 비스무리한 건물 하나도 보이질 않았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정신은 온전하시니까. 도둑이라도 그 허름한 집에 가겠어, 훔칠만한 것도 없겠고. 무슨 일 있었으면 말씀하셨겠지, 하며 젓가락을 휘휘 저었다. 뭉친 면발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좀 전에 괜히 그런 말 해서.”
경쾌한 소리에 비해 불공평한 쌍쌍바처럼 갈라진 젓가락으로 슥슥 비비는 아버지, 그 앞으로 탕수육을 살짝 밀며 말했다. 괜찮다며 면발이 후루룩 올라갔다.
"뉴스에서도 시골집만 털러 다니는 놈들이 있다고 하더라. 너라고 그런 걱정이 없겠냐, 그럴 수 있는 일이지."
"그래도 미안해요. 좀 좋게 말해도 되는 건데."
"내 반이 닮았으면 성격이 좀 차분할 텐데. 어찌 열불내고 성질머리 급한 건 엄마를 닮아서, 참."
그리고 다시 한번 면이 올라갔다. 제법 아버지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도 한 입, 오랜만에 짜장과 널브러진 상자들을 보니 이제 막 이사 온 기분도 들었다. 햇살도 조금 전보다 봄다운 기분, 역시 짜증 날 때 사람은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배고프고 아프면 성질머리가 나온다고 하던데, 나는 그마저도 대단치 않은 데다가 고고한 아버지와는 딴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면 한 젓가락 하고 나서 큼직한 탕수육을 소스에 푹 찍었다. 한입 베어문 단무지는 짜장 한 구석에 놔두고 다시 한 젓가락. 동네에서 오래 살아남은 중국집다운 맛이었다. 다 먹고 나거든 환기도 좀 하고 이참에 봄맞이 청소를 해야겠다고, 그래도 아버지 짐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고. 새 단무지를 베어 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