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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Apr 04. 2023

새벽과 부끄럼

 한참 전에 읽었던 책을 펼쳐 들었다. 찾으려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다. 좋아하는 책에 비상금을 숨기려 한 적도 없거니와 한번 읽어서 내용을 알면 다시 읽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다만 늦은 새벽에 일어나 멍한 상태로 책을 하나씩 꺼내서 펼치고 덮고 하면 게으르지 않게 느껴진다. 대단치도 않다만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는, 적당한 열정과 휴식을 두고 살아가는 착각에 빠진다고 할까? 하나씩 사다 보니 모인 고전문학과 때마다 유명했던 책들이 빼곡하다. 먼지도 만만치 않다. 쓸어내리듯 훑으니 부드럽고 내밀한 감촉과 중간중간 튀어나온 책갈피가 손끝에 걸렸다. 메모지가 튀어나온 경우나 형광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책도 있었다.


 나는 하나 집어서 그림책 보듯 휘리릭 넘겼다. 온갖 단어들이 문맥에 상관없이 파편적으로 눈에 밀려왔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게 걸리기라도 하면 멈춰서 읽는다. 더 읽어보고 싶으면 오른쪽에, 아니다 싶으면 왼쪽에 놓았다. 그렇게 책을 뒤적이다 보면 비슷한 단어에서 멈춰서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꼭 단어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그림일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몇몇 단어와 글귀를 모아다가 하나로 엮어내면 제법 그럴싸한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행운은 내 삶의 기본값이 아니므로, 얼마 안 가서 등산로 입구에 옹기종기 모이는 돌탑처럼 책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는 숲을 떠돌았다. 종이가 된 나무들은 모두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메모가 툭 떨어진 것은 하늘이 파래질 즈음이었다. “아직도 찾지 못했는가”하며 올려다보는 탑 두 개 앞으로 굴러간 그것은 손바닥만 했고 엽서만큼 두꺼웠다. 멋도 모르고 샀던 에리히 프롬 책에서 떨어졌으므로 분명 어린 날 치기가 담겨있겠거니, 생각하며 읽어볼 책들로 놓았다. 책에 삼 분의 일, 앞에만 너덜너덜하고 밑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6년 전 11월 어느 날 오후에 시작하는 메모로 보아 그즈음에 샀으며 꽂아둔 것이겠다. 그리고 “무슨 배짱으로 이런 책을 샀는지 몰라” 하며 메모를 읽어보니 세상에, 이제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는 누군가와 헤어지며 쓴 글이었다! 목 아래부터 볼을 따라 눈가까지 화르륵 타올랐다. 열렬히 사랑했으나 헤어진, 정확히는 차인 상황 속 나는 청승맞다 못해 세상 다 잃은 듯 절절한 말을 쏟아냈더랬다. 이런 걸 버리지 않고 잘도 끼워놨다니. 차라리 비상금이 들어있으면 좋았겠다. 잘못에 대한 자책과 슬픔, 그리고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낯부끄러운 그것은 방금 산 책처럼 빳빳했다. 두껍지도 않은 책 사이에서 한참을 살아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뒤에 놓고 빼곡하게 적힌 것을 읽어 내려갔다. 문장을 지날 때마다 흐릿하게 칠해지는 모습과 분위기, 찰나가 띄엄띄엄 떠올랐다. 미안함이나 사랑 따위는 없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는지 우는지 끅끅거리듯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부끄러움, 그런 색으로 가득했을 뿐이다.


 퍼질러진 책들을 다시 꽂는 동안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가부좌를 풀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책처럼, 서로를 찾아 모인 그것들은 각기 다른 색임에도 모여들어 하나가 되어갔다. 이때는 정말 좋았다거나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는데, 지금 같으면 더 나았겠다 하는 식. 결국에는 어려서 그랬겠거니 하고 말았다. 벌써 몇 년이 지났으며 그 이후로 그런 관계를 되풀이하진 않았으니까, 그러면 된 거라고. 흑역사가 부끄럽다면 자신이 바뀌었다는 증거일 뿐이겠다.

     

 배관을 따라 물이 빠져나가고 문 여닫는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렸다. 정신이 들자 온 사방이 깨어나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덧 밝아진 창문으로 차들이 나다니는 엔진 소리가 쏟아졌다. 새벽 동안 고른 책 몇 권이 책상에 올라왔고 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를 따라 옅은 커피 향이 맴돌았다. 벌써 아침이니 지나간 것은 내려두고 잠을 깨워야 할 시간이다. 4월 봄날은 하고 볼 일이 워낙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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