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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Aug 28. 2023

낙엽

 한참 전부터 벚나무 잎사귀가 얼룩덜룩하더니 이제는 아예 떨어졌다. 일찍 꽃 피우는 만큼 가을이 되면 가장 먼저 잎을 떨어트리는 나무가 벚나무라 한다. 따갑게 내리쬐는 오후면 여전히 매미도 있지만, 밤에 우는 풀벌레들과 시원해진 밤공기가 생생하다.


 나는 가을이 좋다. 추석은 별로지만 가을 특유 청명한 하늘색과 약간 차가운 바람이 좋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낙엽이겠다. 딱히 나무를 가리지는 않는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좋고, 단풍나무는 또 단풍나무대로 좋다. 다만 그 이유가 색깔만은 아니다. 꽃잎이 열매를 기약하며 떨어지듯, 내년 봄에 새순이 나기를 약속하며 떨어지는 게 낙엽이기 때문이다.     

 떨어지고 말라서 밟으면 바삭거리는 낙엽을 가련하게 봤던 때가 있다. 과학으로는 겨울을 나기 위한 생존 전략이라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봄을 지나 여름 내내 보던 모습과 다른 탓이다. 죽은 듯 앙상한 가지는 끊어보지 않는 한 그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하기 어렵고, 밟히면 그 모습마저 잃고 바스라질 뿐이다. 겨울잠과 밤, 추위와 죽음처럼 겨울 했을 때 떠오르는 감상의 뿌리가 꽤 깊은 곳에서부터 온 모양이다. 여러 신화와 이야기를 떠나서도 겨울만큼 추우면서 날이 짧은 계절은 또 없으니까. 낙엽이 지는 모습은 가을이 오고 있음이며, 그만큼 겨울도 가깝다는 말이겠다.


 나는, 이제는 낙엽이 좋다. 발에 치이는 낙엽과 나무가 나와는 한참 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죽은 듯 보이기만 할 뿐이라 그렇다. 그 거리감은 내 눈에 보이지만 내 것이 아닌 관계다. 손에 닿고 지나치기도 하지만 오직 그뿐이다. 관심은 있을지언정 소유하지 못하므로 책임이 없다는 말은 얼핏 차갑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땅이나 화분에 내가 사서 심고서 무언가를 바라고 키우는, 그런 소유를 의미하는 건 아니므로 나를 냉혈한이라 바라보진 않았으면 한다.     

 무엇에 대해서든 나와 그 사이는 정말 다양하기에 하나만 콕 집어 말하기 힘들겠다. 그럼에도 최대한 간단히 해보자면, 의지로 줄일 수 있는 공간과 절대로 다가설 수 없는 선으로 이뤄지겠다.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은 이를테면 마당에 나무를 심을 수 있다. 물을 주고 다듬으며 자라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 나무는 물리적으로 나와 가깝고, 또 돈이 받쳐주는 권리로 내 소유겠다. 그러나 내 것이라 하더라도 그건 표면적일 뿐이다. 누군가 거절할 수 없는 돈으로 그 나무와 땅을 산다면 슬퍼할 겨를이 있겠는가. 더 극단으로 가면, 나는 나무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고, 그것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인간과 같은 두뇌와 이성, 지능이라 부르는 것만을 생각이라 할 수 있을까. 나무는 싹을 틔우거나 꽃 피울 시기를 기억했다가 맞춰 움직이고 수많은 생물과 화학물질로 소통한다. 이를 지능으로 볼 수 있는지는, 흥미롭지만 다음에 이어가겠다.)


 나무를 예시로 들었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같은 맥락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가까워질 수 있지만 그뿐이다. 이 거리감은 내 모든 행동에 제약이며 이유가 된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만 말처럼, 가까울수록 내 삶에 파고든다. 태양의 중력에 잡혀 지구가 빙빙 돌아도 몸무게는 내 발이 닿은 지구에 영향을 받듯, 지구를 빙빙 도는 우주 쓰레기보다 당장 내일 점심값 오른 것이 와닿는다. 낙엽과 풀벌레 소리가 좋은 건 적당히 떨어져서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덕이다.

 그런데 무언가가 내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방에 숨어들었다가 들킨 바퀴벌레나 모기, 친구로만 생각했던 누군가의 부담스러운 시선과 태평양을 한 바퀴 돌고서 기어이 전 세계 곳곳으로 퍼진다는 해류처럼. 내 마음과 달리 가까워지려는 모든 것은 부담으로 들이친다. 해를 끼치지 않겠노라 소리치더라도 말이다. 이는 내가 다가설 때도 마찬가지이다. 낙엽 하나 밟고 모기 한 마리를 손뼉으로 잡을 때마다 울상을 짓는다면, 설령 그게 내 마음으로만 있을 뿐이라도 나는 버틸 수 없겠다. 바람과 다른 바람이 어긋나 부딪치면 회오리가 치기 마련이다.

     

 낙엽은 죽은 듯 보이기도 한다. 잎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를 생명으로 본다면 그럴 수 있거니와, 실로 병들거나 문제가 생겨서 떨어지는 게 낙엽 아니던가. 어차피 겨울이 되어서 추위에 떨다가 하는 수 없이 떨어지기도 한다. 엽록소가 분해되어 알록달록 색이 드러나고 마르다가 떨어진다는, 바닥에 덮여서 부엽토를 이루고 양분으로 된다는 설명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봄을 기약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래서 활짝 핀 단풍을 보면 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꽃잎이 때를 알고 떨어져야만 열매가 자랄 수 있다. 꽃잎처럼, 낙엽은 눈을 덮고 있다가 한참을 지나 봄이 되면 흙이 될 것이다. 과정이 아플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살아가려는 최선과 희망은 언제나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끈다.  

   

 가을이 되면 문득 시집을 찾아 읽어본다. 낮이 짧아지고 적적해지다가 기어이 가을을 타는 탓일까. 집에 오가며 이제는 잎을 다 떨군 벚나무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샛노랗고 우아한 은행잎만 볼 게 아니고 떨어진 모든 게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밤이 길어지는 가을이 오고 있다. 아직 벼도 한참 파랗고 8월이지만, 오글거리는 말을 떠올리다 남몰래 식은땀이 흘러도 썩 괜찮은 가을 말이다. 요 며칠, 늦여름도 여전히 여름이라는 듯 한낮 햇볕은 따갑기 그지없지만, 푸르스름한 새벽엔 나름 괜찮다.

 뒤숭숭한 요즘 마음과 참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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