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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문화 정말 싫다.

제발 말로 표현하자.

by 진하린



사람의 마음은 말로 표현해야만 알 수 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이해한다. 다만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솔직하게 본인의 얘기를 하지 않는 상황들이 내게는 항상 불리하게 적용 된다는 것에 대한 불만도 함께 품고 있다.

나는 말로 표현해주지 않으면 못 알아채는 눈치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말을 아낄 때마다, 나 혼자만 멍청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눈치가 없었던 나에게는 항상 난제였던 것이 상대방의 ‘언짢음’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내가 분명 무언가 실수를 하긴 했을텐데, 대부분의 상대방은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대놓고 표현할만큼 크게 기분 나쁜게 아니거나, 혹은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상대방인 내가 한 행동이 지탄받을만큼 큰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었겠지 싶다. 다만 나는 그런 미묘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캐치할만한 능력이 없었고, 결국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교정할만한 조언을 받은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사람들은, 특히 눈치를 중요시하는 예민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한 표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좋게좋게 돌려말하거나, 표정 및 은유적인 표현으로 슬그머니 표현하는 것들 말이다.


그냥 상대의 행동이 불편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면 될텐데, 마치 대놓고 표현하면 상대가 보복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극도로 표현을 아낀다.

그래서 그들의 '애매모호한' 표현을 못알아듣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면, 항상 뒤늦게 쪼르르 달려와서 ‘사실 그 때 네가 한 행동이 기분 나빴어’라고 한다. 진작에 좀 말해주지...


나는 실수했을 때, 바로바로 얘기해주면 '아 내가 이런 부분을 신경쓰지 못했구나'하면서 바로 사과를 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바로잡을 기회를 받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더더군다나 내 실수를 나중에라도 알려주는 이런 경우는 틀어지기 직전까지 갔던 관계가 운 좋게 봉합 된 다음에나 생기곤 한다.

대부분은 본인의 망상 속에서 ‘저녀석은 어차피 말로 해도 못알아들을거야’라고 재단해버리고 멋대로 관계를 끊어버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 회피형 인간들이랑 대체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편이다. 내가 그들과 의견조율을 해볼 새도 없이 그들은 홀연히 사라지거나, 지인을 통해서 불만을 토로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샌드백처럼 얻어맞을 뿐이지만.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본인이나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라고들 표현하는데...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것은 솔직히 핑계라고 생각하고, 그저 본인이 곤란해지기 싫은 것 때문이라고 느껴진다. 어차피 그러다가 관계가 파탄나면 상처입는 것은 매한가지다.


애초에 서로의 생각을 눈짓 손짓만으로는 알 수가 없으니까 발생한게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짐승들처럼 마땅한 언어가 없어서 침팬지마냥 '우끼끼' 거려야 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말을 아껴서 뭐에 쓰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놈의 의중이 어쩌구 저쩌구...

굳이 동물계에서 가장 발달된 언어체계를 놔두고 비언어적 표현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서 숨질 것 같다.



하얀 도화지에 하얀 선을 그어놓은채, 못 보고 넘어간 사람들을 힐난하는 이들이 참 많다.




예민하고 눈치보는 사람들이 '언어'를 아껴댄 덕분에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 의도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답답해서 속이 뒤틀리고, 나처럼 눈치 없는 사람들은 예민한 사람들이 왜 기분 나쁜지 몰라서 당황하며 조심스럽게 굴어야만 한다.


하얀 도화지에 하얀색 물감으로 선을 그어놓고 '이 선을 넘으면 안 돼'라고 해버리면, 그 선을 못 보고 넘은 사람이 잘못일까? 굳이 하얀색으로 선을 그은 사람이 잘못일까? 라고 탓하고 싶어진다.







아무튼 나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이전에 비해서는 실수하는 횟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다. 비록 또래들보다는 한참 수준이 떨어지지만서도, 굳이 나대지 않고 조용히 있기만하면 큰 트러블은 일으키지 않을만큼은 연기할 수 있었다.

덕분에 회사생활 하는 동안에도 그다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7년을 보냈고, 그와 더불어 어느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마지막 말은 좀 문맥에 안맞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이 그렇다. 나는 남들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실수할만한 환경을 최소화했다. 그 말인즉슨 누구와도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거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필시 무례를 범하는 실수가 생기기 때문에 나는 코로나가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상대방과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왔다. 일터에서 만날 때는 결코 선을 넘지 않을 수준에서만 정중하고 바른 이미지의 사람으로 남으면 되었고, 사적인 연락은 일절 차단했다.


덕분에 나는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은 잘못’을 범하는 실수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들으면서 답답해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이 방법은 결코 바른 방법은 아니다.

마치 암세포를 사멸시키기 위해서 체온을 40도까지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암세포도 40도가 넘어가면 죽지만 사람도 40도에서 죽는건 매한가지 아니겠나? 내가 취한 방식도 나를 죽이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 덕분에 나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채 성공적으로 외톨이가 되었다.

36살이지만, 이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법을 모르겠다. 눈치를 주는 사람들 때문에 눈치도 없는 주제에 눈치만 보다가 그 눈치에 매몰되어버린 비참한 자의 말로로 가장 훌륭한 사례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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