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하린 Mar 25. 2024

번아웃이 왔다. 그리고 난 장작을 패러 떠났다.

타닥 탁 탁.

벽난로에서는 매서운 불길이 장작을 열심히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장작 부스러기 말단 부분부터 밝고 노랗게 빛이 나면서 닳아 없어지는 과정은 마치 생쥐가 치즈를 갉아먹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타닥 거리는 불꽃 소리에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자리에 앉아 멍 때리면서 불꽃에 홀린 채 멍 때리는 행위, 즉 ‘불멍’을 하고 있는 H는 지금 일생에 있어 가장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 그는 온전한 휴식을 택했다. 이 휴식이 끝나면 은퇴할 날까지 다시는 못 쉴 수도 있으니까.

7년에 달하는 직장생활은 그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앗아갔다. 건강지표는 그의 신체나이보다도 3배는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마치 마녀의 저주에 걸려 노안이 되어버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 소피처럼 말이다. 숱한 야근과 크런치모드는 회사 외의 생활을 꿈꿀 수 없도록 만들었다. H는 챙겨야 할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 있는 친구마저도 멀어져 어색해질 만큼이나 오랫동안 두문불출 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는 건강도 잃고, 친구도 잃는 섭섭한 상황을 맞이하며 점점 더 지쳐갔다.


벽난로 앞에 앉아 불멍을 때리는 그의 멍청하게 늘어진 표정을 보면 연상하기가 무척 힘들긴 하지만, 의외로 그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엄청난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의 열정은 마치 장작에 불을 붙이기 전에 사용하는 마른 나뭇가지나 낙엽, 혹은 착화제처럼 빠르게 타올랐다. 젊고 건강하고, 열정 넘치는 일꾼.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않고, 오로지 프로젝트를 멋지게 성공시켜서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기록하겠다는 집념. 그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열정적인 청년이라는 멋진 타이틀에 취해 있었다. 그 취기가 너무 강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비롯 주변의 많은 것들이 망가져간다는 것까지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장작에 불을 붙이는데 도움을 주는 착화제의 불꽃은 강렬하긴 하지만 오래 타지는 않는다. 장작에 습기가 많다거나 하는 이유로 불이 제대로 옮겨 붙지 못하면, 새로운 착화제를 다시 구해서 불을 붙여야 한다. H의 첫 불꽃 또한 장작에 제대로 옮겨 붙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그의 첫 프로젝트는 대학 동아리에서 시작한 스마트전구 제품 제작이었는데, 나름 크라우드 펀딩까지는 성공했으나,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처참하게 망한 채로 끝이 났다.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스타트업 프로젝트의 상당수가 겪는 뻔한 배드엔딩이었다.


H의 인생에서 이때 처음으로 번아웃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미처 장작을 제대로 태우기도 전에 짧고 굵게 착화제만 태운 격으로 열정을 허비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겪는 첫 좌절감은 생각보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냈고, 허무함에 빠진 H는 그동안 꾸준히 해 오던 루틴을 놓아버렸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기라든가, 조깅이라든가, 웨이트 트레이닝이든가, 식단관리라든가 하는 건설적인 것들 말이다. 어차피 그것들 모두 지키면서 열심히 살아도 안 될 일은 안 된다는 사실을 겪어버렸는데, 굳이 스스로를 옥죄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첫 프로젝트를 실패하기 전까지는 삼시세끼 칼로리가 적은 발사믹 식초 드레싱과 닭가슴살 혹은 돼지 앞다리살이 들어간 샐러드를 먹으며 지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물만두 1봉을 끓여 먹고도 모자라 삼겹살 네 줄을 추가로 구워 먹고 있다. 아침마다 하던 조깅은 이젠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없어졌기에, 그 자체로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던 시간에는 신작 게임을 하거나, 치킨을 시켜 먹었다. 꾸준한 운동으로 근육과 함께 식욕을 늘려온  H에게 1인 1 닭은 일도 아니었다.

도를 닦듯 절제해 오던 사람이 끈을 놓아버리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궁금하다면, 그저 H의 생활을 관찰하면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망가진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 왜 7대 죄악에 폭식과 나태가 있는지도 그의 비대해진 몸과 불규칙한 생활패턴을 보기만 해도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H가 허전한 마음을 포만감과 쾌락으로 가득 채우려는 것처럼 미친 듯이 먹고 즐긴 덕분에,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H의 몸은 20kg이나 불어났다.


‘꺼억’

야식을 챙겨 먹고 게임을 하던 H는 수시로 트림을 해댔다. 처먹은 음식의 양만큼 가스는 많이 생성되는데, 최소한의 움직임도 없는 생활 때문에 장 또한 태업하기 일쑤였고, 아래로 나오는 가스보다는 위로 나오는 가스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정상적인 생활 패턴을 할 때와는 달리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이 역겨운 트림이 나올 때면, 메슥거림도 함께 올라왔다. 

트림의 냄새가 역겨운 건지, 치우지 않은 방의 냄새가 역겨운 건지, 혹은 그냥 살찌고 더러운 본인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역겨운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이 기분은 H에게 극심한 자기혐오와 동시에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잠깐만,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은 아닐 텐데’

혼탁해져 있던 H의 눈에서는 총기가 돌아오고, 동시에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생존에 대한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이대로 나태하게 살다가는 정말 더 이상은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겠다는 걱정이 그를 각성시켰다. 마치 타다 남은 잔불에 적절한 산소가 공급된 것처럼, 스멀스멀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록 살이 찌고 머릿속이 혼탁해져 있는 채로 3개월을 보냈어도, 아직 열정을 품고 살아가던 시간의 온기가 아직도 느껴지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그때의 충만했던 감각을 되살릴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메신저에서 그를 향한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이전 창업 박람회에서 인사 나누었던 A입니다]




엎어졌던 프로젝트의 그림자를 뒤로하고, 새로운 스타트업의 연구원직을 맡음으로써 H는 다시 궤도에 올랐다. 그가 열심히 했던 프로젝트인 만큼 비록 팀이 와해되긴 했어도 포트폴리오는 남은 것이다. 그가 해 온 것을 눈여겨본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미 망해버린 과거의 그 프로젝트를 홍보하던 자리에서 만난 A였다. 전시장 옆 부스에 있어서 대화를 나눈 것이 인연이 되어 아주 가끔 연락을 해오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H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전의 프로젝트 실패로 인한 조바심, 그리고 나태했던 기간에 대한 수치심은 H가 인정욕구에 목마르게 만들었고, 때마침 들어온 제의는 H의 마음에 화려하게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이 전 프로젝트에서는 착화제가 장작을 그을리는 수준에서 끝났다면, 이번에 마음속에서 피어난 불꽃은 이미 장작을 감싼 채 열심히 타오르고 있었다. H에게는 그저 창고에 있던 장작들을 풀어서, 벽난로에 꾸준히 던져주면 되는 최적의 상황이 갖춰졌다. 이번에는 불꽃을 꺼뜨리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H는 다시 일에 매진했다. 프로젝트가 엎어져버리는 이전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다시  스스로를 절제하고 관리하던 빡빡한 삶으로 돌아갔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프로젝트에 더욱 집중을 하기 위해 생산성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건강관리를 위한 루틴을 없앴다는 것 정도였다.

이미 크나큰 실패를 겪었던 그는 건강관리나 취미생활마저도 그의 업무에 방해되는 요소가 되리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시간에도 오로지 일에만 매진했으면 투자자를 구할 만큼 프로젝트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고, 일이 궤도에 올라서 돈을 벌어야만 다른 걸 할 자격이 생길 거라는 스스로의 평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에 매진하며 살았던 덕분일까?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H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멀끔해졌다. 크라우드 펀딩을 성공해서 받은 100여만 원 이후로는 무보수로 일했던 첫 번째 프로젝트와는 달리, 두 번째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지금은 나름 친구들에게 밥을 얻어먹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돈을 벌 수 있었고, 친척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볼 때도 쭈뼛거리며 대답을 얼버무릴 필요가 없어졌다. 사람구실도 못하던 한량 같은 모습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던 과거는 뒤로하고, 이젠 성공한 스타트업에 소속된 훌륭한 연구원이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두 번째 프로젝트가 대박을 치진 못할지언정 당장에 망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회사에서 스스로를 갈아 넣다시피 일했다. 명시된 퇴근 시간은 6시였지만, 그 시간에 퇴근해 본 기억이 없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본인이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야근을 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자신이 하는 프로젝트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새벽에 사무실에 혼자 남아 코피를 휴지로 틀어막으며 일을 하는 자기 모습에 반쯤 취한 채 고통을 즐겼다. 

그를 등 떠밀고 있는 절실함, 이미 한 차례의 실패로 늦었다는 부담감, 나태했던 과거의 모습을 지우고 싶은 수치심이 불꽃에다가 기름을 부은 듯 H를 자극했다. 이미 열정의 불꽃은 그의 마음속 난로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크기였지만,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듯 장작을 끝도 없이 던져대었다. 마치 자신이 영원히 타오를 수 있다고 자신하듯 말이다.




하지만 3년, 5년, 그리고 7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열정을 태울 장작이 점점 고갈되어 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거의 광기와 집착 수준으로 전념하던 그 모습은 스스로가 취할 정도로 멋졌고, 커리어적으로도 제법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지만, 반대로 인간으로서의 H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업무에서 화려한 하이라이트 필름을 작성해 나가는 동안, H의 육체는 손목터널증후군이라던지, 허리디스크라던지, 지방간이라던지 온갖 화려한 질병들을 마감세일하는 마트에서 쇼핑하듯 쓸어 담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동안에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은 이제는 연락처마저 남아있지 않았고 그저 외톨이가 된 자신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결국 H는 회사에서 일한 지 8년을 조금 못 채운 시점에서 퇴사를 마음먹게 되었다.

더 이상은 난로에 넣을 장작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다 타버린 재 위에 남은 잔불이 미열을 남긴 채 숨이 다 해가고 있었다. H의 의욕은 더 이상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없는 상태였다. 망가진 육신과 함께 망가진 정신으로 허덕이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이렇게 H는 인생에서 2 번째 번아웃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릴 적 보았던 소년만화에서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무한한 열정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갔다. 마치 태양처럼 끊임없이 타오르는 모습은 H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본인도 그들처럼 끝을 모르고 타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H는 소년만화 주인공만큼의 커다란 그릇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노르웨이 숲 속 어느 오두막에 있는 가정용 벽난로처럼 소박한 화력을 갖추고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열정도 순간적으로는 밝게 타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더 많은 장작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자기 몸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내달리던 그의 7년은 창고에 쌓아뒀던 장작을 전부 고갈시켰다. 난로 속 잿더미만 남겨둔 채 말이다.

그의 몸과 마음이 더 이상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불꽃을 태운 7년을 뒤로하고, H는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노르웨이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자기가 키우고 싶었던 고양이의 종이 노르웨이숲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책 제목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랬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H의 머릿속에서는 노르웨이의 숲 속 오두막만이 가득 차 있었다. 자기가 가고 싶은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허기진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원했다.

노르웨이가 무슨 말을 쓰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문화나 음식, 국기 모양을 포함해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그저 추운 나라에서 벽난로를 앞에 두고 뜨개질이 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H는 본인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비행기 티켓을 끊고, 오두막을 대여해 주는 에어비앤비를 찾고, 여권을 재발급받았다. 이후의 일은 아무런 생각도 해두지 않았다. 월세방에서 다달이 빠져나가는 돈도 무시했다. 이미 집을 샀거나, 살 예정이었던 동료들과 떠들면서 조금씩 구체화시켰던 ‘돈을 모아서 집을 사야지’ 같은 생각조차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퇴직금은 당장의 욕망을 위해서만 사용할 뿐이었다. 마치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퇴직 후 몇 달이 지나 노르웨이의 어느 숲 속 오두막에 몸을 의탁한 채 매일같이 벽난로의 재를 쓸어 담고, 장작을 패며, 난롯가에 이불을 덮고 앉아 반쯤 졸며 뜨개질을 하는 H의 모습은 퇴사 직후의 모습과는 다른 충만함이 있었다. 여태껏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을 뒤져봐도 찾아볼 수 없었던 여유와 행복감은 이제 얼굴을 뚫고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방을 메기만 해도 저릿저릿 저려오는 손과 기침을 할 때마다 찌릿하는 허리디스크, 그리고 미쉐린 타이어 마스코트처럼 부풀어버린 몸.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던 그였고, 아직도 몸의 일부는 고장 난 채로 삐걱거리지만, 잿더미가 되어버린 마음만큼은 이제 다시 깔끔하게 단장한 새로운 난로가 되었다. 아직은 불꽃을 피우고 장작을 던져 넣을 때가 아니지만, 이 오두막에서 뜨개질하는 것이 지겨워질 때, 불멍을 때리는 것이 지겨워질 때, 낮잠을 자는 것이 지겨워질 때가 되면, H의 마음속 헛간에 충분한 양의 장작이 쌓였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충분히 쌓아놓은 장작을 다시 던져 넣으리라.

이번에는 한 번에 소진되는 일 없이 천천히, 꾸준하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번 주는 망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