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릎 Sep 25. 2021

몰래 없이 들었던 말들

첫 시집 이름을 생각하다

<프롤로그>


 나는 등단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나 회의 같은 게 부쩍 늘었다. 인정과 고백은 언제 어디서나 머뭇거려지는 것. 괜히랄 것도 없이 부끄러운 것.


 등단과 나 사이의 먼 거리를 인지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세상엔 시도 돈도 잘 쓰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두 번 째는 삶이다.

'삶'은 나와 씀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선 기어이 사선으로 눕는다. 그리곤 악랄한 기지개를 켠다. 다 큰 어른이 1cm라도 더 큰 키를 통보받으려고 발목 밑에 묘한 긴장을 두는 것처럼. 은근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꽤나 두텁고 역력한 악력을 느낀다. 세 번째는 갈 길 잃은 내 글의 갈피다. 언제부턴가 내가 쓰는 글에 특성이나 개성이 뭉툭뭉툭 빠지고 있음을 느낀다.  무엇을 쓰는가 보다 누구를 위해 쓰는가에만 몰두했던 지난날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누구라는 대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흔들리는 무엇으로는 누구에게도 감동을 전하기 힘들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서 아쉬움이 짙고 또 묽다. 그러나 안다고 달라지는 결과는 없다. 등단과 나 사이의 거리감은 승복한 지 오래. 그럼에도  나는 등단이라는 꿈을 놓지 못한다. 등단을 하고 싶다.


 왜?라고 물으면, 나의 엮인 글들이 '책'이라는 결과물로 인정받는 시초이자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큰 욕심이 없다. 다만 내 글들을 묶어놓은 걸 두고 누군가가 "시집아", "시들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준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다섯 번도 넘게 울고 웃고 또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이유라면 등단 없이 내 시들을 엮어봐도 되지 않을까? 내어놔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시집이 반칙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글집'같은 급하게 가져온 단어를 써서라도 고쳐 내어놓으면 될 일 같기도. 


비공식 시집을 준비하기로 한다. 준비가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그러다가 문득, 시집 제목이 내게 왔다. <몰래 없이 들었던 말들> 꼬아낸 부분이 없어, 하수 느낌이 짙지만 내가 쓰는 시들의 근간 혹은 도처에 가장 가까운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고백하자면 일부러 들으려던 말보단, 들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듣고 만 말들로부터 영감을 많이 받는다. '몰래'할만한 말들을, 지하철에서/버스에서/공원에서/숲에서/골목에서/옆집에서/골목에서/난간에서/빗속에서 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만큼 몰려있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아픔 같은 것들에게 자꾸 자리를 내어주다가, 비명 대신 그 삶들을 얌전하게 얘기한다.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담담하게. 그 말들을 내가 자꾸 듣는다. 줍는다. 아까워서 담고, 상상하고, 아파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나는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허락은 받지 못했지만, 몰래는 아니므로 나는 그 들었던 말들로부터 파생되는 시상들을 가져다가 시로 만들어 볼 셈이다.


 이곳에 담을 시들은 모두 '남'으로부터 발화하지만, 모든 '나'들에 위해 완전히 진화되길 바란다. 왜냐면 남과 나는 제한 없이 우리에 담길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남의 말들로 나의 글들을 빚는 일.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닿도록 하는 일. 시덥잖을지는 몰라도 시다울 수는 있는 일. 그래서 나는 쓰기 시작한다. 몰래 없이 들었던 말들을, 시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