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싱클레어에게 쓰는 편지

편협하게 <데미안> 읽기

by 지독


읽는 내내 자꾸 이청준의 소설 중에 <병신과 머저리>에서 나오는 한 문구가 생각이 났다. 내가 참 좋아하는 문구이기도 한데, 바로


그렇다면 형은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웠다. 언제나 망설이기만 할 뿐 한 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였다. 자기 실수만이 아닌 소녀의 사건을 자기 것으로 고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양심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확인하고 새로운 삶의 힘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1966


내가 에밀 싱클레어를 바라보는 태도를 그대로 말해주는 문구다.



1. 에밀 싱클레어에게 쓰는 편지


누군가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편지를 써보는 것은 정말 처음이라 조금 긴장이 됩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는 차치하고도 말이에요. 나는 이 편지를 쓰며 명작이라는 <데미안>의 주인공인 당신에게 왜 그렇게 몰입할 수가 없었나 하는 반성과, 혹시 내가 덜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종의 열등감도 느낍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나는 에밀 싱클레어, 당신을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좋아할 필요까지도 없어요. 좋아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몰입의 필수조건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어쨌든 당신에게 몰입하는 것조차 아주 힘들었습니다. 당신이 쓴 문구 중에 가장 유명한 그 문구 말입니다. 알에서 깨어나고 어쩌고 하는 문구. 그것만으로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역시 그 문구가 유명한 것은 이유가 있더라고요. 당신이 살아보려 했던 당신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그것. 그러니까 당신의 메타포를 가져다 붙이자면 알을 깨고 나오는 새. 아브락사스에 닿으려는 새. 나는 그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때를 겪습니다. 사춘기라고 부르죠. 굳이 유년시절이나 청년시절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꼭 한 번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자신을 탐구하게 돼요. 생존이 먼저냐, 실존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논의라 어쨌든 그런 고민도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 유려한 메타포로 점철된 아포리즘 이외에 당신에게서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는지, 나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나는 우선 자기 자신을 향한 당신의 태도에 일차적인 거부감을 느꼈어요. 스스로의 나약함에 취해, 철저히 고립되고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은 남과 달라 보이니 얄팍하게 우월해하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나약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개인적으로는 저는 그런 태도를 무척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끊임없이 말하는 '의식'이라는 것, 인간의 존재 이유와 운명이라는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어떤 순간이자 여정이라는 것은 독단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당신에게도 어떤 계기가 있었지요. 프란츠 크로머, 그 어둡고 악한 세계를 대표하는 그 소년 말입니다. 사실 나는 거기서부터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어요. 밝은 세계와 악한 세계라니! 철저히 기독교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관에 나는 이미 충분히 넌더리가 나 있습니다. 당신이 끊임없이 말하는 운명, 목적 그런 것을 갖다 붙여 볼까요? 그럼 프란츠 크로머는 악한 세계에 속한 아이고 그에게는 밝은 세계로 넘어올 여지란 없고 그것이 운명이고 목적이며, 그 아이는 그런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게으르고 남의 돈이나 삥 뜯고 남에게 거짓을 말하게 하는 악한 이일 뿐입니까? 세상사라는 것이, 그리고 인간사라는 것이 그렇게나 쉬운 일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쉬운 선택을 할 뿐이에요. 쉬운 선택을 거부하며 고뇌하기에 인간 존재는 나약함에서 벗어날 여지가 있을 뿐이죠. 거기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습니다. 행동의 결과에는 들이댈 수 있을지 몰라도요. 지금의 나조차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당신이 왜 싫은지를 이렇게 구구절절 타이핑을 해가며 나의 거부감을 나 스스로 납득하고 더 나아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당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이 쪽이 훨씬 편하고 쉽거든요. 당신은 프란츠 크로머라는 아이의 일생을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충분히 아나요? 당신은 당신이 아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라 바보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아는 것만을 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내가 알 수 없다고 믿어요. 그러므로 나는 당신처럼 쉽게 밝고 어두운 것, 선하고 악한 것. 그런 것 따위의 쉬운 구분은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합니다. 말하자면 나는 쉬운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내 인생의 커다란 목표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선험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라기보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내가 정해온 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의문이 들었어요. 당신에게는 당신의 것이랄 게 있는가? 고립된 상태로 알 속에서 치열한 고민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나? 당신은 비유적으로 당신이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라고 했지만 사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이기가 어려워요. 당신은 당신의 조건에 영향을 받고, 당신의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알처럼 둥지 속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요. 그런데 당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조건이나 환경 따위는 별로 상관없이 당신 혼자 모든 것들을 독단적으로 헤쳐나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알이라기보다 동면이나 고치에 가까운 것 아닐까요? 당신의 고립과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것 같아 보여서요. 나는 언제나 생각하지만 고립은 탈피했을 때에야 그 의미가 빛을 발합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부터 말해온 밝은 세계라는 것도 그 어두운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지요. 당신의 유복하고 따듯한 가정환경, 신앙등이 당신을 가난하고 음습하고 악한 어두운 세계로부터 지켜준다고 당신도 인정하다시피 말이에요. 특권이라고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혼자 삶을 끙끙대며 홀로 영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꼴이라니. 특권이라고는 모를 이미 생존부터 위협받았을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악하다고, 멍청하다고 소리를 치죠? 모두가 당신처럼 유복한 가정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도 대학에 가고, 한량처럼 시간을 낭비해도 비난 정도 받고 끝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종말의 시작>에서야 나는 책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책에서 서술한 전쟁의 광기, 군중적 광기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지만 변태적인 쾌감을 느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정말 생과 사가 오가는 곳에서 그 위협이라는 것을 제대로 맞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요. 그제야 당신은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어요. 짜릿했습니다. 이건 정말 나의 못된 버릇이에요. 습성인지. 내가 틀리다고 생각한 사람을 끝내 굴복시키고 짜릿해하는 이런 야만적인. 적어도 나는 변명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된 면이 있고 가끔 악하기까지 하다고도 느껴요. 변태적이고 야만적인 부분도 있지요. 당신도 다르지 않아요. 그 모든 모습은 당신이 스스로로부터 치열하게 부정해온 모습들입니다. 부정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게 인간이니까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허무주의적으로 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나는 이럴 때의 나를 창피해하고 되도록 일상생활에서는 이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반성하고 후회합니다. 그것 또한 인간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고서야 '우연'이라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래요. 모든 것은 우연히 벌어진 일입니다. 치밀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우연인 거라고요. 아무것도 영속적인 것은 없어요. 당신이, 혹은 우리가 얻은 특권도 당신의 혹은 우리의 불행도. 삶에서 필연적인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개연성은 생길 수도 있겠지만) 혹은 필연적으로 삶이 굴러가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일어나야 하는 대로 일어나는 일들이 드무니까요. 오히려 삶은 그래서 공정해요. 개인이 누리는 특권은 모두 우연하게 주어진 거라 어떤 개인도 특별하지는 않으니까요. 각자가 고유한 인간들이기는 하고 그 고유성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건 아주 개인적 차원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의 고유성은 당신에게만 의미가 있지, 당신의 고유성과 다른 이의 고유성이 다르다고 해서 우열이 정해지는 건 절대 아니라고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나약한 엘리트주의자에 나르시시스트예요. 좀 겸손해지세요. 전쟁이 끝나고 폐허 위에 서 있다 보면 당신의 자의식 비대증도 좀 고쳐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전에 살아남아야 하겠지만요. 총알도 인생 못지않게 공정하니까요.


2. 누가 병신이고 누가 머저리인가? 에밀 싱클레어와 나를 향한 냉소


자꾸 <병신과 머저리>라는 소설이 맴돌아 결국 데미안을 해치워버리고 다시 그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 사실 안 신기하다. 제목이 병신과 머저리 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거기에 에밀 싱클레어가 가득했다. 소설 속 화자인 '내'가 보기엔 형이 에밀 싱클레어였고, 나와 과거에 연인이었던 혜인에게는 '내'가 에밀 싱클레어다. 소설 속에서 혜인이 '나'에게 쓴 편지에서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책임질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음으로써 책임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까지 믿는다. 그리고 그의 해답은 언제나 자신의 안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사실 풀리지 않던 해답을 여기서 얻었다. 뜻밖의 우연이다. 내가 에밀 싱클레어를 참을 수 없어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행동과 책임이었다. 그는 무슨 행동을 했지? 그래서 그는 제대로 책임을 졌나? 프란츠 크로머를 악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에밀 싱클레어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고, 데미안에게 행동을 떠넘겼다. (에밀 싱클레어라면 아마 데미안이 먼저 나서서 해결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것 같지만) 그 후에 비겁하게도 그는 데미안을 회피했다. 나는 그것이 그의 방황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고 책임지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이 어쩌다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다며 길을 잃은 이유조차 모르는 머저리 같은 방황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방황을 한다. 에밀 싱클레어에게 깊이 공감했거나 감명을 받은 사람들을 모욕하려는 것은 정말 아니다. 에밀 싱클레어는 아주 인간적이다. 책임을 회피하고 쉬운 선택만을 하려 한다는 점에서. 나는 다만 그가 넘치는 자의식으로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것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방식에 환멸이 났을 뿐이었다. 각자인 개인은 모두 다르다. 그건 우월할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다가 다시 생각했다. 혹시 나도 그럴까? 사실 앞서 인용한 문장은 <병신과 머저리>에서 형에게 '내'가 하는 말이지만 다시 읽으니 사실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 환부가 어딘지도 모르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나' 이므로. 사실 알고 보면 형은 행동을 했고 그것에 선악의 쉬운 잣대를 들이대기 이전에 그는 충분히 그것으로부터 고통받으며 고민하며 그의 선택 이전에 행동함으로써 책임은 이미 지워졌다. 책임질 행동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형은 어쨌든 뭐라도 했다. 환부 없는 고통, 얼굴이 없는 그림. 남의 행동이나 주워다 자신의 고민거리로 삼는 사람, 그것은 바로 '나'였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에밀 싱클레어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것은 혹시 자기혐오일까?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밀 싱클레어나 나나 병신과 머저리가 아닐까, 결국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잘 알고 있었으나 또한 발견한 것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