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의 사랑은 사랑일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단지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넘어 그가 자기만의 시간과 기억으로 축조해온 세계를 탐험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랑이란 서로 다른 개인이 소유한 두 세계의 만남과 합일의 과정일 수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는 완전한 사랑을 위한 두 세계의 충돌과 붕괴 그리고 재건의 이야기다.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휴식을 위해 찾은 시골의 작은 호텔에서 알마를 만났다. 상류사회의 디자이너와 웨이트리스. 레이놀즈의 입장에서는 영감을 얻기 위한 새로운 뮤즈의 간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알마의 생각은 달랐다. 저녁식사를 제안하는 레이놀즈에게 미리 자신의 이름을 적어둔 쪽지를 내미는 장면에서 이미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의 전형성은 상실된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연인이자 모델로서 런던 생활을 시작한다. 그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드레스를 입고 의상실 일을 돕는다.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해온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아직 제한적 연인이다. 알마를 자신의 세상밖에 두고 예술가와 뮤즈의 도구적 관계로 한정지으려 한다.
도구적 관계가 아닌 진정한 연인이 되고자 하는 알마는 둘만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레이놀즈의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오일과 소금만으로 요리된 아스파라거스만 먹는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버터에 조린 것을 내놓는다. 그의 취향을 몰라서가 아니다. 외부자가 아닌 연인으로서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요구다. 하지만 레이놀즈는 자신만의 세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알마가 불편하다.
레이놀즈는 그가 정한 세세한 규칙들로 촘촘히 직조한 세계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누구도 그 세계로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이란 것이 낯선 세계와의 결합이라면 그는 애초부터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그가 알마의 절규에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성을 내는건 넌센스다.
레이놀즈의 방어기재는 엄마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열여섯살이던 때 엄마는 재혼을 하며 그를 떠났다. 엄마의 부재는 누구에게나 상처겠지만 레이놀즈에게는 유난하다. 그녀는 레이놀즈에게 드레스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생물학적 생명뿐만 아니라 그 이후 삶의 살아가는 원천을 부여한 존재다. 공주의 드레스 옷섶에 숨겨 넣은 ‘난 저주받지 않았다’는 쪽지는 그가 아직 엄마에게 버림받은 기억에 갇혀있음을 방증한다.
기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엄마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유령의 모습으로 그 주변을 떠돌 뿐이다.
알마가 독버섯 가루를 넣은 차를 레이놀즈에게 먹이고 그를 쓰러뜨리는 건 자신의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도발이 아니다. 저주의 벽안에 스스로를 가둔 레이놀즈에 대한 구원의 과정이다. 쓰러진 레이놀즈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주변을 부유하는 엄마의 환영이 아니라 곁에 있는 알마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아직 레이놀즈와 알마의 두 세계가 합일의 과정을 거친 건 아니다. 알마에게 자신의 세계로의 진입을 허락했을 뿐이다. 여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면서 알마의 세계를 곁눈질할 뿐이다. 그는 주저한다. 결혼이란 최악의 선택을 했다고 불평하지만 내심 알마의 세계가 궁금하다.
알마는 다시 한번 독버섯 요리를 레이놀즈에게 내어놓는다. 레이놀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자신을 아직 둘러싸고 있는 강박의 벽을 허물고 알마의 세계를 받아들이라는 초대장이다. 레이놀즈는 알마의 눈을 응시하며 독버섯을 머금고 다시 한번 그녀에게 쓰러진다.
두 세계의 충돌은 두 번의 붕괴를 통해 하나의 세계로 재건되었다. 사랑의 모습이 모두 이처럼 죽음을 넘나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상상은 분명히 헛된 바램일거다. 완전한 합일이 쉽지 않겠지만 사랑은 두 세계의 교집합을 넓히고자 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얼마 전 ‘인생은 독고다이(어차피 인생은 혼자 살아내는 것')’라는 말로 아내를 눈물짓게 했다. 순간적으로 그녀 앞에 유령실로 짠 벽이 보였을거다. 이제 말도 안되는 개똥철학은 버릴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 식탁에 버섯요리가 올라온다면 눈 질끈 감고 맛있게 먹으리라. 아주 맛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