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 열기로 가득 찬 독일에서 보니 더 그렇다
독일은 EM2024 열기로 뜨겁다. 비록 독일 대표팀이 8강에서 좌절하고 말았지만, 여전히 독일 국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뮌헨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4강이 열리는 날, 오렌지 물결로 가득 찼다. 매일매일 유럽 대표팀 축구를 보는 건 내게 럭셔리 그 자체다. 독일,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등의 축구를 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루마니아나 슬로베니아만 봐도 '어, 나 쟤 어디서 봤는데'하는 스타 선수가 하나씩 있다. 오스트리아가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거나 조별리그 내내 졸전을 펼친 잉글랜드가 눈 깜짝할 사이 결승전에 올라있다. 월드컵 결승까지 갔던 크로아티아는 첫 3경기 후 짐을 쌌다. 라민 야말은 학교 숙제를 하면서 EM 최연소 골을 터뜨렸다. 다양한 기쁨과 충격이 뒤섞이고 축구를 즐기는 유럽 팬들은 늘 시끌벅적하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대표팀의 주축을 이룬 선수들이 이 유럽에서 뛰고 있다. 그들과 한솥밥을 먹는 동료들이 각자의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저 팀들이 곧 다음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만날 상대다. 감히, 조금은 견줄만한 팀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월드컵에서 한국이 그걸 보여줬고, 비록 위르겐 클린스만으로 잠깐 주춤거렸지만 지난 시간 쌓아온 주춧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을 노릴 수 있는 팀이 되었으니, 재료는 다 준비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수장만 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라고.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5개월 간 그 기대를 높였다. 위르겐 클롭 급 감독이 올지도 모른다는 이영표 위원의 말을 비롯해 제시 마치(개인적으로 엄청 기대했다), 세뇰 귀네슈 등 이름이 거론됐다. 나는 한국 축구와 가까이에 있지 않으니 5개월 동안 어떤 구체적인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자꾸 한국인 임시 감독으로 구멍을 메꾸는 게 영 불안해 보였을 뿐. 정해성 전 전력강화위원장의 기자 간담회에서는 두 문장에 눈에 띄었다. "국외 지도자를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건 아니다", "국외 지도자의 경우 한국 문화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겠다."
저러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한국인 감독이 선임되는 것은 아닌지.
그 우려는 현실이 됐다. 울산현대의 수장(이었던) 홍명보 감독. 세상에. 진짜?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축구 기자가 되기도 전엔 까마득한 옛날로. 동시에 그저 아득해졌다. 와, 어떡하냐....
울산현대 팬들이 가장 걱정됐다. 시즌 도중에 대한축구협회가 자기 팀 감독을 쏙 빼간다니. 이게 가능하단 게 놀랍다. 울산현대 팬들은 경기를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맞아야 했다. 감독 발표가 난 후 경기장에서 그들은 홍명보 감독에게 울분을 터뜨렸다. 그들이라고 이렇게 홍명보 감독을 욕하고 싶었을까. 함께 이룬 과거가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이별이 이런 식이라면 말은 다르다. 아무리 대표팀 감독 발표가 중요해도 그렇지.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감독이 울산현대 팬들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할 기회까지 빼앗아갔다. 홍명보 감독 선임 배경을 두고 이임생 기술총괄이사가 한 말. "K리그 우수 선수 발굴, 선수 컨디션 체크, 연령별 연계성을 위해 국내감독 선임이 필요했다." 이렇게 K리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K리그를 대하는 행동은 왜 저런 식인가.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진다.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축구연맹은 같은 건물에 있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두고 충분한 회의는 거친 거겠지? 그 회의 결과가 이런 상식 밖의 일이라면 더 실망이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다른 독일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알려줬다 (독일에서도 한국 축구는 꽤나 흥미로운 이슈가 된다). 시즌 도중 감독을 대표팀 감독으로 데려가는 행위에 다들 황당하고 놀라워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유로움 속 기강이 필요", "원팀", "외국인 후보자들이 유럽 빅 리그 경험이 있고 확고한 철학이 있는 건 존중하지만 홍명보 감독보다 뚜렷한 성과가 있진 않았으며 한국에 입히기엔 시간이 부족."
홍명보 감독을 선임한 이유들.
지금 2024년이 맞나요? 우리 대표팀 멤버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건지? 토트넘 캡틴 손흥민, 마인츠 주전 이재성, 바이에른 뮌헨 김민재, 파리 생제르망 이강인, 슈투트가르트 정우영... 팀에서 영향력 있는 선수들이 전부 유럽 탑 리그에서 뛰고 있다. 바이에른 뮌헨이랑 PSG까지 갖춘 역대급 구성이다. 그 선수들은 곧 대표팀 후배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비록 후배 선수들이 K리그에서 뛰고 있다고 하더라도 유럽 축구를 간접적으로 계속 경험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은퇴한 윗선배들 기성용, 지동원, 박주호 등은 끊임없이 유럽을 오가며 공부한다. 현 대표팀 고참들이 조언을 구하는 그 선배들 말이다. 이렇게 우리 대표팀의 눈높이는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왜 그런 그들의 레벨을 맞춰주지 못하나. 저 유럽팀들을 상대로 이기고 싶어 하면서. 왜 기껏 쌓아놓은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조금이라도 다시 세울 노력을 하지 않는 건가.
박주호부터 박지성까지 나서 이건 아니라고 얘기하는데, 대한축구협회의 수장은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중대한 사안을 두고 그저 뒤에 숨어있다. 뭐, 여기부터는 감히 내가 언급할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접어둔다. 관련해 선배들이 시원하게 다뤄주고 계신다.
휴, 이 정도로 한국 축구가 망가질 수 있다니. 이런 엉망진창 분위기 속에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홍명보 감독이 과연 그놈의 '기강'을 잘 잡을 수 있을까. 우리 대표팀이 세계적인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얼마나 많을 텐데. 이렇게 또 퇴보한다.
EM을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더 속상한 것 같다. 축구는 팬들에게 이토록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대회는 곧 축제인데, 이게 맞는 분위기인데, 저 멀리서 한국 축구는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더 크게 대비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 대표팀도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한데, 왜 분위기를 자꾸 망치는지.
그냥, 먼 독일에서 끄적어본 푸념. 슬프다, 한국 축구.
근데 진지하게 궁금한 거 하나.
전략강화위원회는 진짜 왜 있던 거예요?
사진=정재은, 대한축구협회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