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여행올 때마다 벽이 점점 높아진다.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달인 10월, 어김없이 나는 한국을 찾았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모두 독립시키고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하셨다. 낯선 동네. 집에 들어서니 익숙한 냄새가 낸다. 내 방도 여전히 존재한다. 내가 중학생 때부터 사용하던 오래된 가구들이 작은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마치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공간이지만 친숙하고, 따뜻하고, 편안하다.
집 근처 세곡천에 갔다. 엄마, 아빠와 함께 작고 예쁜 세곡천을 걸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커다란 건물숲 사이에 이렇게 반짝이는 시냇물이 흐르고, 정돈된 화단과 나무를 보다가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다이소나 올리브영 등의 매장이 등장하니, 그래. 여기 한국이구나, 싶었다.
걷다 보니 조금 출출해졌다. 엄마가 좋아하는 팥집에 들렀다. 단팥빵과 팥빙수, 커피 등을 파는 정겨운 팥 전문 카페였다. 우리는 팥빙수와 생크림단팥빵, 팥빵을 주문했다. 정확히 말하면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했다. 직원 한 명이 있었지만 갓 구워진 빵을 오븐에서 꺼내는 중이었다. 그는 사람이 오가는 것조차 보지 못하는 듯했다. 요즘 한국은 웬만하면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한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주요 서식지가 독일인 내게는 너무나 어색했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서면 직원과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주문을 하는 게 익숙한 내게는, 키오스크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인사를 나누고,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잠깐의 교류조차 없어졌다니. 팥빵은 주문 후 진열대에서 알아서 가져가면 되는 건지, 팥빙수가 나올 때 직원이 함께 주는 건지 알 겨를이 없었다. 주문을 마친 후 어색하게 근처 테이블에 앉았다.
곧 팥빙수가 준비되었다. 직원은 내게 "생크림단팥빵과 팥빵은 챙기셨나요?"라고 물었다. 마침 냉장 쇼케이스에 생크림단팥빵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여 저걸로 달라고 했다. "아니요,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몰라서..."라고 어색하게 말할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왠지 진땀이 났다.
불편함과 어색함도 잠시,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시원한 생크림단팥빵에 매료되고 말았다. 쫄깃쫄깃한 빵의 식감과 한입 베어 물면 듬뿍 새어 나오는 생크림, 그 안에 숨은 달콤한 팥. 정말 오랜만에 맛있는 디저트를 먹었다. 엄마와 아빠도 맛있게 드셨다. 나는 다음날에도 이곳에 와서 생크림단팥빵을 먹었다.
한 일주일쯤 흘렀을까. 또 생크림단팥빵이 생각나 팥집에 갔다. 이번엔 다른 직원 두 명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역시 눈을 마주치고 인사할 기회는 없었다. 난 나름 익숙해진 키오스크 앞에 섰다. 아, 이런. 생크림단팥빵에는 커다랗게 품절이라고 적혀있다. 아쉬운 대로 단팥빵이라도 먹을까 했더니 역시 품절. 진열대에도 없고, 냉장 쇼케이스에도 없다. 먹고 싶은데... 직원들에게 혹시 오늘 언제 다시 나오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두 명 모두 나를 등지고 있어 부르기 조차 애매했다. 고객과의 소통을 최소화하고자 만든 게 키오스크인데, 키오스크에 품절이라 적혀있고, 그걸 보고도 직원에게 내가 말을 걸면 나는 진상 고객이 되는 게 아닐까.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겹쳐 흘렀다. 나는 뻘쭘하게 몸을 돌렸다. 목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고 "안녕히 계세요"라고 내뱉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괜히 서글펐다. 저런 기계 때문에 작아진 내가 싫었다. 먹고 싶은 걸 못 먹었다는 사실까지 더해져 더 속상했을테다. 사실 이번 한국 여행에서 어느 카페를 가도 눈을 마주치고 나를 반겨주는 직원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커다란 키오스크 기계가 나를 가로막는다.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꺼낼 수 조차 없게 키오스크는 내 입을 틀어막는다.
한 번은 무의식에 포스기 앞에 가서 주문하려 하자 직원은 "키오스크 이용해 주세요"라며 내 말을 잘라냈다. 아무런 공격성이 없는 말이었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카페에만 있는 특별한 메뉴를 시도하고 싶은데 맛이 상상이 되지 않는 음료 이름에 포기하고 말았다. 물어보고 싶지만 어떡해. 크고 투명한 벽이 내 앞에 우뚝 버티고 있는 걸.
나도 모르게 바뀌어있는 어떤 문화에 자꾸 치이고, 데이고, 상처받는다. 너는 더이상 '주류문화'에 낄 수 없다며 외치는 것 같다. 나를 자꾸 밀어내는 기분이다. 속상하다.
그러다 지하철에서 아이를 안은 엄마를 위해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젊은 여자를 본다. 군중 속에 갇힌 셀러브리티가 누군지 몰라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한 한 팬은 그의 프로필을 명랑하게 읊어준다. 그래, 이런 거였지. 내게 익숙한 한국. 따뜻한 정이 오가는 내 나라. 낯선 분위기에 사로잡혀있다가 다시 한번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이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욕심일까.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자기만의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을 탓하는 건 어쩌면 이기적인 게 아닐까.
그냥, 나의 오랜 가구들처럼, 어떤 것들은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