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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라떼 Jan 01. 2023

별일 없이 산다는 것

평범함의 힘 

별일 없이 사는 걸 끔찍하고 지루하게 여겼던 시절이 있었는데, 살다 보니 어느샌가 별일 없이 사는 게 꿈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연말연시엔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기를 바란다는 동화 같은 덕담보다, 별일 없으시길 바란다는 덤덤하고 싱거운 말이 차라리 더 따뜻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몇 년 동안 그놈의 별일이 너무 많아서, 소중한 사람들과 내 자신이 그저 아프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어릴 때는 나도 커서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고작 6kg짜리 배낭을 짊어 메고 몇 달씩 여행하던 날들처럼 삶도 늘 행복하지는 않아도 생동감 넘치고 치열할 줄 알았다. 사회의 시선과 기준에 맞추어 사는 삶은 나에게 맞지 않을 거야. 가난하고 불안정할지라도 매일이 펄떡펄떡 뛰는 신선한 모험으로 가득한 인생은 얼마나 즐거울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맡은 역할이 주연도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작은 엑스트라 역을 성실하게 완수하고 퇴장하는 것도 쉽지 않고 중요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 애초에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엑스트라인가? 대규모 상업영화에서의 엑스트라의 인생도 확대해서 관찰하면 독립영화의 주인공이다. 지루할 틈 없이 모험과 사건이 쉴 새 없이 터지는 인생을 꿈꾸던 나는 이제 작고 느릴지라도 나만의 규모와 속도로 살아가는 데 만족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외할머니가 치매로 기억을 잃고 혼자서는 대소변도 못 가리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할머니가 어린 시절 내게 해준 것들을 이제는 내가 할머니에게 해드려야 한다. 기저귀를 갈아입히고, 씻기고 먹이고 재운다. 물론 나는 해외에 사니까 가끔 한국에 갈 때 말고는 할머니를 매일 돌보는 건 엄마의 몫이 되었다. 


1930년대생인 할머니는 식민지와 해방, 전쟁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의 소용돌이를 살아냈다. 공부를 좋아했고, 배움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그 시절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식 당일까지 얼굴도 몰랐던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에는 혼자 힘으로 자식 셋을 키우고, 자식을 다 키웠나 싶을 즈음엔 손주까지 키웠다. 


어린 나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고 초등학교 숙제를 봐준 것도 할머니였다. 방학 숙제와 개학 전날 밀린 일기 쓰기도 주로 할머니와 했다. 할머니가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날씨를 확인하면 내가 일기장에 받아 적었다. 고사리 캐기와 곤충 채집도 할머니와 함께였는데, 우리는 팀웍이 아주 잘 맞았다. 나는 외동이어서 할머니는 내게 할머니이자 부모님이자 형제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성인이 되어 호주에 오고 나서도 이틀에 한번 꼴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다를 떨었다. 할머니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기 때문에 좋은 일도 속상한 일도, 연애사도 모두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할머니와 그런 시시콜콜한 통화를 할 수 없다. 자주 가지도 못하지만 한국에 가서 할머니를 만나면 손녀 얼굴도 제대로 못 알아보면서 나를 보고 웃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몇 밤 자고 다시 올 거라는 거짓말을 한다. 물론 할머니는 그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치매는 가족력이 높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운동을 시작하고 식습관을 바꾼 지 꽤 됐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신년 목표를 세우는데 가짓수가 매년 줄어든다. 목록이 이백여 개도 넘는 버킷리스트에도 새 항목을 추가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고등학교 때 썼던 ‘우주여행', ’남극탐험’, ‘비 내리는 경계선에서 팔 벌리고 서 있기’ 같은 것들이 여전히 버킷리스트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아쉬울 것 같지는 않다. 드디어 어릴 때는 끔찍하게 싫어했던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삼십 대가 되었는데, 그래서 행복하다. 나는 요즘 아주 절실히, 평범하게 살고 싶다.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삶은 됐으니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래 보고 기억하면서 소소하고 별일 없는 인생을 살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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