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ss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현 Oct 21. 2023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출근길의 보물

보물섬김밥


출처 : 보물섬김밥 (네이버 지도 업체 사진)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출근길의 보물





망원역 2번 출구를 나왔을 때는 오전 9시 10분 무렵이었다. 햇빛이 뜨거웠다.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 앱을 열었다.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몇 번의 신호음이 흘렀다. 



“보물섬김밥입니다.”

“지금 한 줄 포장하러 갈게요. 네, 보물섬김밥 한 줄이요.”



2021년 2월부터 1년 반 동안 나는 마포구 망원동으로 출근했다. 인디 뮤지션의 콘텐츠팀에 합류해 이런저런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사무실은 6호선 망원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위치한 한강변의 아파트. 보물섬김밥은 그 중간에 있었다. 아침마다 거기에 들러 김밥을 포장했다. 주문하면 보통 5분에서 10분 정도 걸린다. 초반에는 망원역을 나서자마자 매번 네이버 지도에 검색을 해서 전화를 걸었다. 자주 가다 보니 그것도 번거로워 아예 번호를 저장해버렸다. 이후로는 더 빠르고 편하게, 익숙한 내용으로 주문을 마쳤다. 제 시간에 맞춰 픽업을 해 사무실로 향하는 내 손에는 항상 검은색 비닐 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진 출근길 루틴이었다. 



보물섬김밥의 대표 메뉴는 ‘보물섬김밥’이다. 상호명을 그대로 가져온 메뉴가 있다면 한 번은 먹어봐야 한다는 게 미식의 ㅁ자도 모르는 나의 원칙. 가장 자신 있는 메뉴이므로 굳이 이름까지 걸었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에서 기인하는 고집이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틀리지 않았다. 유부와 우엉이 가득 들어간 보물섬김밥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잘게 썬 여러 재료가 한 번에 입으로 들어오는 기본적인 경쾌함에 아삭한 식감을 더한 우엉, 그리고 참기름 바른 밥과 계란 지단이 주는 고소함을 극대화하는 유부. 과한 것 하나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부드럽고 담백한 풍미를 전하는 보물섬김밥을 한 줄 먹고 나면 늘 기분 좋은 배부름이 따라 왔다.



주먹밥은 또 얼마나 많이 사먹었는지 모른다. 횟수로만 치면 김밥보다도 주먹밥을 포장해 간 적이 더 많을 것이다. 당시 2,000원 하던 김치주먹밥과 참치주먹밥을 매일 같이 번갈아가며 먹은 시기도 있었다. 단순한 구성의 재료를 아낌없이 팍팍 넣은 뒤 커다란 모양으로 턱턱 뭉쳐 은박지에 돌돌돌돌 싸주던 주먹밥. 나는 검은 비닐봉지에 나무 젓가락을 넣고는 “안녕히계세요!” 힘차게 인사하며 사무실로 향했다. 일하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으나 얼른 가서 주먹밥 한 입 크게 잘라 먹을 생각을 하면 자동으로 속도가 빨라졌다. 



한 번은 김밥을 포장하시던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근처에서 가게하죠?”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어, 저요? 아니요. 직장이 근처에 있어요.” 그런 나를 스윽 보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참 성실해서.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똑같은 거 사가니까 망원동에서 가게 하는 젊은 사장님인가 싶었지.” 그도 그럴 게 나는 나름대로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는 데다가 (이를테면 삐져나온 턱털이라든지, 품이 큰 후드티나 츄리닝 바지 같은),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찾아 왔으므로 일반적인 회사원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근데 또 오전 시간에 꾸준히 들르는 걸 보니 자연스럽게 자기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이 매장 오픈 전에 김밥을 사가는 거라고 추측했던 거고.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생각의 흐름이라서 재밌었다. 살면서 성실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손에 꼽아서 머쓱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주 오는 나를 기억하고 궁금해 했다는 사실이 보물섬김밥을 향한 애정이 확 커지는 계기로 이어졌다. 일하는 입장에서 보시기에도 나는 엄연히 이곳의 단골 손님이구나. 그간 지출했던 돈과 시간과 마음을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꽤나 짜릿했다.



전국 김밥 맛집을 총망라한 가이드북 <전국김밥일주>의 저자 정다현은 보물섬김밥을 이렇게 표현했다. “망원동 주민에게는 보물 같은 김밥집” 아쉽게도 나는 망원동 주민은 아니었지만, 회기동 주민을 거쳐 불광동 주민으로서 방문했지만 그런 내게도 이곳은 보물섬이었다. 하루의 시작을 함께하는 보물로 가득한. 출근길의 기분을 책임지는 맛과 영양의 보물들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보물섬. 기어이 또 찾아오고야 만 월요일을 깨우는 동력은 보물섬김밥으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 김밥 안에 든 유부의 고소함은 이틀 연속으로 먹어도 중독성이 줄어들지를 않는군.

‘솔직히 여기 참치주먹밥은 1년 365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보물섬김밥에는 기꺼이 믿고 걸어볼 수 있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맛있었다면 내일도 분명히 맛있을 거라고. 이 김밥과 주먹밥이 함께한 나의 어제도 오늘도 썩 괜찮았으니, 내일도 그럴 지도 모른다고. 여전히 출근길의 발걸음이 무겁고 퇴근길의 한숨이 축축하지만, 한두 발짝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나는 지금 제법 근사한 날들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한결같이 알차고 푸짐한 김밥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나는 딱 하루치의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2023년 10월 6일. 오후 4시가 되어가는 시점에 문득 보물섬김밥이 그리워졌다. 서교동의 한 카페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하던 중이었다. 힘들었다. 전날 잠을 별로 못 잤는데 그마저도 이리저리 뒤척이는 바람에 숙면을 취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른 아침에는 취재 업무를 진행하긴 했으나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는데도 기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배고파서 더 힘이 없었던 것 같다. 대충 때운 점심식사의 여파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급격하게 찾아온 허기로 인해 집중력은 흩어지고 기분까지 서글퍼지려던 무렵, 불현듯 떠오른 나의 보물섬. 카페에서 20분이면 걸어갈 수 있었다. 포장해서 근처 놀이터 벤치에 자리를 잡아도 좋겠지. 하지만 고민 끝에 나는 포기했다. 늦은 저녁에 여자친구와 함께 집밥을 먹기로 했으니까. 명절 때 가져온 간장게장을 해치워야 했다. 꽃게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의 장단에 맞추려면 그 전에 배를 조금이라도 채워서는 안 된다.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며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찾아 갈 생각이다. 이왕 오랜만에 가는 거 9시 20분에 맞춰서 방문할 것이다. 출근할 직장은 없지만 지난 출근길 루틴을 고스란히 재현하리라. 아주머니가 그대로 계실지는 모르겠다. 계시면 좋겠다. 날 알아봐주시면 좋겠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서운함을 내비치며 숭덩숭덩 김밥을 썰어주시면 좋을 텐데, 이건 너무 간 건가? 어쨌거나 확신한다. 그때도 나는 힘찬 하루를 시작할 용기를 고작 김밥 한 줄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보물섬김밥은 1년만에 먹어도 똑같이 맛있을 테니까. 회사를 그만둔 뒤로 해가 바뀌었어도, 나 역시 변함없이 제법 괜찮은 일상을 살고 있다며 확인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보물섬김밥

서울 마포구 월드컵로13길 50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정 없으니까 하나 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