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최종 편집권“은 언제나 나에게 있다
나는 에디터 선배가 없었다.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콤플렉스였다. ‘나는 에디팅을 배운 적이 없다’라는 불안은 ‘내가 정말 에디터가 맞나?’ 하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지큐나 보그 따위의 그럴듯한 매체를 무턱대고 동경하던 마음… 거기에는 편집장과 디렉터와 수석 에디터로 불리는 이들을 선배라고 부르고 싶다는 열망도 포함돼 있었다.
최혜진 작가님을 만난 이후로 이따금 나는 ‘좋아하는 선배’라는 말을 입 밖에 낸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거나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은 없다. 첫 직장에 다니며 섭외 메일을 한 번 보냈던 게 인연의 시작이 될 거라곤 그때는 몰랐지. 우리는 소속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나 혼자 선배를 보며 많이 배웠다. 근사하고 탁월한 작업물이, 눈을 바라보며 건네는 단호하고도 다정한 조언이, 무엇보다 갈팡질팡하는 후배들을 위해 새로운 움직임을 모색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전부 귀감이었다.
《에디토리얼 씽킹》 역시 내게는 당연히 나왔어야 할 책으로 보인다. 자기 메시지를 발신하는 사람은 몸 안에 일정 수준의 이야기가 쌓일 때마다 교통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선배는 20년간 체화한 업의 기술을, 기술을 지탱하는 태도와 기준을, 태도와 기준을 지켜 나가며 발견한 삶의 가치를 정직하고 명료한 언어로 기록했다.
실용서와 예술서와 에세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이 책을 ‘에디팅 교과서’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단언컨대 《에디토리얼 씽킹》은 기획/편집/디자인계의 수학의 정석이자 성문종합영어로 오래 회자될 것이다. 나처럼 에디터 한다고 깔짝대면서 기본기 1도 없는 주니어 레벨 친구들한테는 더더욱. 까놓고 말해서 브랜딩이 어쩌니 기획이 저쩌니, 영감 호소 인사이트 호소하는 전문가 중에 속 시원하게 가이드 제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매번 다 아는 원론적인 얘기, 있어 보이지만 모호하기만 한 얘기에 지친 분들이라면 이 책의 출현이 반가울 테다. 군더더기 없는 개념 정의와 다채로운 예시가 쏟아지는 《에디토리얼 씽킹》의 미덕은 정확성과 구체성에 있다.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좋은 가르침은 반성과 자긍심을 동시에 준다고. 부족한 재능과 게을리한 노력과 이미 갖고 있는 자질을 하나하나 짚어줄 때, 그 섬세한 발견을 등에 업고 나는 겨우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 마땅한 이름과 설명을 찾지 못해 등한시했던 내 안의 가능성들을 저자는 이유와 목적을 좇는 예리한 질문들로 호명한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책장을 덮기 전부터 솟구쳤던 이유다.
《에디토리얼 씽킹》이 말한다. “삶은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편집 결과의 축적”이다. 생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나 서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펜을 쥔 나에게 달려 있다.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라는 권능을 놓치지 않는 이상, 나는 어떤 사건 앞에서든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진실에 기댈 수 있을 것이다.
에디토리얼 씽킹
저자 최혜진
출판사 터틀넥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