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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Oct 22. 2023

오토바이와 약수터


1987년 9월 8일     
오늘은 화요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후에) 아빠와 오토바이를 타고 약수터로 갔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원한 약수물은 언제 마셔도 맛있었다. 시원한 약수물에 세수도 하였다. 긴 파이프로 물이 나오기 때문에 별 큰 지장은 없었다. 오늘은 참 즐거웠다.     


*     


마당 넓은 집으로 이사   아빠는 오토바이를 샀다. 스쿠터가 아니라 엔진 소리 요란하고 번쩍번쩍 광이 나는 멋진 오토바이. 아빠는 출퇴근은 자전거로 했지만, 휴일이면 이따금 오토바이를 타고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혼자  때가 많았고 가끔은 엄마를 태우기도 했다.     


일기를  날은 화요일이다. 회사에 있어야  아빠와 약수터에  사연이 있다. 아빠는 1987 5 30 회사를 나왔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아빠 뒷바라지를 하고 살림에 열심이던 엄마에겐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일이었다.      


엄마는 이럴  없다고, 우린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다시 돌아갈  없는 거냐고 울며 매달렸다. 아빠는 난감한 얼굴로, 어쩔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퇴사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이날 이후 엄마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은 미래를 꿈꾸던 반짝임이 사라지고 절박함과 그늘이 깃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회사에 탄원서를 써보고 아빠의 동료들을 찾아가 방법을 묻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와 가장 절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징계를 받아   동안 출근을  한다는  알게 됐다. 아빠는 자진 퇴사가 아닌 해고를 당한 거였다. 대체 셋이서 무슨 짓을  거냐고,  당신만 해고된 거냐고 묻고 따져도 아빠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없을  우리에게 말했다. 아빠는 회사에서 화투 노름하다가 걸려서 잘린  분명하다고. 맨날 보일러실에서 화투친   알고 있었다고. 나는 아빠가 정말 경솔하고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아빠가 창피함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는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2002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관공서에 들어갔을 , 4 총무과장이 공보실에서 기자들과 화투 치는 모습을 봤다. 기자들에게 돈을 잃어주기 위한 업무의 일종이라는 이야길 공보실 직원에게 들었다. 나쁜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는 뇌물을 그런 식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오리탕집에서 회식을 하고는 여직원들만 집으로 보낸  바로  자리에 담요를 깔고 화투판을 벌이기도 했다. 상갓집에선 화투를 치며 밤을 새워주는  예의였다. 그러니 직장에서 화투를 쳤다고 해서 해고로 이어지는  1980년대 시대적 분위기로   설득력이 부족한 이야기였다.     


직장생활을 하며 세상을 알아갈수록 아빠가 해고된 이유가 무엇인지, 문득문득 궁금했다. 그럴 때면 어떤 장면들이 툭툭 떠올랐다.     


1987 , 어느날 아빠는 우리를 모아놓고 ‘유니온 대한 이야길 해주었다. 유니콘도 아니고 유니온이 뭘까,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더니,  회사에 유니온이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같은지, 우리에게 물었다. 언니도 나도 동생도,  턱이 없었다. ‘어용이라는 말도 그날 처음 들었다. 나는 자꾸 아빠가 좋아하던 가수 ‘이용 떠올랐다.  무렵 아빠는 어디선가 자꾸 노래책들을 가져왔다. 수록곡 중에 유행하던 트로트나 대중가요는 없었다.  같이 부를  있는 ‘비둘기집’ ‘꽃동네 새동네처럼 가사가 예쁜 노래들이었다. 회사 동료들과 근로 교육을 받고 찍은 단체 사진도 앨범에 하나둘 꽂혔다.     


그해 1월엔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도중 사망한 일이 있었다.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봄부터 전두환 정권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한진중공업을 중심으로 민주 노조를 향한 움직임도 거셌다. 민주화 움직임은 우리나라의 아랫동네에서부터 서서히 불붙고 있었다.     


아빠가 해고된 직후, 6 9일에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거리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 무리가  근처를 지날 , 집에 있던 아빠가 나를 데리고 나갔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 팻말을  사람들 무리가 거리를 가득 메운  걷고  걷고 있었다. 아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멀찍이 떨어져  행렬을 바라봤다. 지나던  사람이 아빠를 알아보았다.     


형님, 형님! 같이 들어오시죠!”     


아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장면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겹쳐 보는 건 무리일까. 아빠가 회사에서 사람들과 무언가를 하려고 했었나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답해 줄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고, 나는 스케치만 하다가 내려놓은 그림을 자꾸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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