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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Oct 22. 2023

아빠에게 머리카락을 잘린 날


1992년 8월 22일 토요일 맑음     
오늘 현주가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내 머리에 대해 말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네?”
그래서 나는 껌이 붙어서 잘랐다고 말했다.     


*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좁은 집에서 여름을 보내는 건 무척 힘들었다. 한낮엔 슬레이트 지붕의 이글이글한 열기가 집안까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여름, 나는 또 다른 지옥을 견디고 있었다. 눈만 뜨면 엄마가 쏟아내는 아빠에 대한 불만과 신세 한탄을 듣고 또 들어야 했던 거다.     


7월 말쯤이었을 거다. 나는 견디다 못해 엄마에게 말했다.     


- 그럼 그냥 이혼하세요. 맨날 그렇게 싸우는 거 우리도 지겹고 힘들어요.     


엄마가 말을 멈췄다. 눈에서 화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살고 있는데! 너희 아니면 진작 이혼했어! 너, 두고 봐. 이따 아빠 오면 네가 한 말 그대로 전할 거야!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엄마가 왜 화를 내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아빠가 왔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을 때였다. 아빠가 우리 셋을 방으로 불렀다.     


- 오늘 혜진이가 엄마한테 이혼하라고 했다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 셋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빠가 내게 말했다.     


- 너 아까 한 말 다시 해 봐.

- ...


내가 가만히 있자 내 뺨을 때렸다.     


- 말 안 해?

- (찰싹)     


아빠는 점점 더 화가 나는 듯했다.     


- 가위 가져 와.     


아빠가 내 왼쪽 머리카락을 한 웅큼 움켜쥐었다.     


- 너 아까 뭐라고 했어! 말 안 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걱, 하더니 검은 것이 내 턱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방에 와서 누웠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죽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죽을 수 없으니 방법은 내일 아침에 생각해 보자고 마음을 달랬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밤새 자다 깨다 한 것 같다.     


다음날 인기척에 눈을 떴다. 엄마가 내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고 있었다.     


- 엄마가 머리 예쁘게 빗겨 줄게. 걱정하지 마.     


엄마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의 눈물이 마치 미안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엄마가 정말 내 머리를 예쁘게 빗겨 줄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겼다. 나는 엄마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곤 스르륵 다시 잠이 들었다.     


한가운데 가르마를 중심으로 왼쪽 머리 한 웅큼이 2-3센티미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머리는 무척 더디게 자랐다. 8월 초, 엄마는 스프레이를 사왔다. 가르마를 오른쪽으로 다시 타고 머리를 왼쪽으로 넘겨 잘린 부분을 덮었다. 머리카락이 움직이지 않게 스프레이를 한참 뿌렸다.     


어떻게 해도 티 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외모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나였지만, 마음이 몹시 위축되었다. 누가 봐도, 아무리 봐도 이상하니까. 그래도 방학 동안 영화도 보고 서점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면서 밖으로 많이 돌아다녔다. 친구들은 처음에만 놀랄 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머리에 껌이 붙었고, 어떻게 잘랐는지 자세한 과정을 물어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눈물이 날만큼 고마웠다.      


개학 다음 날, 옆 반 친구가 내게 편지를 주러 왔다. 내 머리를 보더니 “귀엽다”고 했다. 이후부턴 머리 모양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다 자라는 데에는 1년 정도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내 신경은 머리가 아닌 아빠를 향해 뻗어 있었다. 아빠를 미워했고, 증오했다. 머리를 잘린 직후부터 나는 아빠와 같이 밥 먹지 않았다.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빠는 나 들으란 듯 화를 냈지만, 그건 허세라는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빠는 책 좋아하는 나를 위해 서점에서 책을 고르게 하고, 이제 막 오픈한 도미노피자 가게에서 난생처음 피자를 사주었다. 나는 아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책을 사고 피자를 먹었다. 그 역시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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