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호찌민으로 떠나게 되었다. 4박을 할까 5박을 할까 망설이다가 4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삿포로에 가고 싶었다. 삿포로, 삿포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가본 적도 없는 삿포로의 이름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하늘도 이런 내가 삿포로에 다녀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우연히 보게 된 TV 프로그램에서는 삿포로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우연히 펼쳐 든 종이 신문에서는 삿포로의 숙박 시설이 얼마나 쾌적한지를 설파했다(그것도 이틀 간격으로!). 아이 참, 다들 이러면 어쩔 수 없이 가야겠네… 라고 말하며 입꼬리를 올리고 못 이기는 척 항공권을 구매하기엔 가격이 꽤 비싸 고민이 됐다. 선선한 가을인지라 일본 여행이 어느 때보다 성수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깝고, 일본어를 할 수 있으니 말이 안 통한다는 두려움도 없고, 일곱 번의 일본 방문 경험도 있어서 가본 적 없는 삿포로일지라도 편안하게 녹아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뜸 왜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해야겠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냥’ 모든 게 서럽고 서운했다. 또 막막하고 쓸쓸했다. 몇 살 더 어릴 때는 깡으로, 패기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생길이 보이든 안 보이든 척척 나아갔(던 것 같)는데, 몇 살 더 먹고 나니 삶은 질릴 정도로 현실이었다. 내 앞에 드러난 한 걸음만큼의 현실이 무척 막막해서 마음이 답답해졌고, 그 답답해진 마음을 여행으로 달래고 싶었지만 결국 여행도 현실(예: 돈)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나의 시선은 여행에서 다시 현실로, 막막함으로, 답답함으로, 여행으로 이어지는 이상한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두고 두 개의 자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내가 힘드니까 나를 위해 여행을 선물한다고 치면 되잖아? / 이미 그렇게 써 댄 돈이 얼만 줄 알아?
모아둔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냐? / 글쎄, 요즘 같은 상황엔 특히 더 아껴야 하지 않을까?
속이 답답하다고 매번 여행을 가면 어떡해, 좀 참아낼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 참는 게 능사냐, 이게 나만의 방식이면 어쩌려고?
이제 그만 놀러 다니고 정신 차려야지! / 아니, 내가 뭘 얼마나 놀았고 무슨 정신을 못 차렸는데!
몇몇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집필 작업이 혼란에 빠지면서(수입이 적어졌다는 소리다) 갑작스레 그로기 상태를 겪고 있던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갖은 궁상을 떨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앞뒤 재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왔기에 이런 식으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에 짜증이 났다. 생각에 너무 갇힌 탓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호찌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마음속 강력한 여행 후보지였던 삿포로를 제치고 호찌민에 가게 된 데는 지인의 힘이 컸다. 내가 여행을 망설인 이유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그렇다고 철저히 혼자인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어떤 두려움과 약간의 귀찮음, 외로움이 내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혼자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충만한 것인지 주장해 왔던지라 이런 모순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국 나는 발권을 신청했고, 하루라도 괜찮으니 우리 집에 와서 편히 쉬다 가라는 그녀의 말에 의지하기로 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발권을 하고도 수수료를 물고 여행을 취소할까 수십 번 고민했다. 아니 근데 진짜 정재이 씨, 어디 고장났나 왜 이러는 거야……(유유). 낯선 타지에 지인이 있어 든든하긴 했지만 더운 것도 싫고, 호객하려 드는 사람도 싫고, 시끄러운 경적과 무질서도 싫고, 지인과 헤어진 후 혼자인 시간 동안 혹시나 외로움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은 더 싫었다.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돈도 아끼고 싫은 것들도 다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따지는 게 많으면 여행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울적한 마음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 떠나는 일을 포기하지 못했다.
짧은 5일간의 여행이 인생에 무슨 큰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긍정적인 생각을 하든 부정적인 생각을 하든 시간은 흐른다. 한여름 날씨에 맞춘 옷가지들을 가방에 고이 접어 넣고 호찌민으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어떠했냐고 묻는다면, 호찌민에서의 순간들은 울적한 마음을 뒤집지는 못해도 어두운 마음들을 빼낼 작은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땐 눈앞의 풍경을 바꾸는 것이 효과적이다. 일상의 슬럼프를 흔들기 위해 선택한 호찌민, 그곳은 묘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본 작품은 전자책 출간 전 연재로 업로드되고 있으며, 밀리로드 <갑자기, 호찌민>과 동일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