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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May 01. 2021

제주에서 친구 사귀는 법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어제는 날씨가 흐려 가까운 곳을 산책하다 왔다. 언제 비가 쏟아질지 조마조마했다. 우산을 들고 나가기에는 애매한 흐림이나 애매한 거리.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멀리까지 산책을 나갔다 왔다. 그날도 날씨가 좋아서 산책을 나갔다 왔는데, 그 거리로는 만족이 되질 않았다. 여기서 그 거리란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농도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몸살처럼 남쪽 바다를 떠올렸고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살다 보면 충동적으로 떠나게 되는 날이 있다. 날씨 같은 것이 사람의 기분을 흔들어 하늘을 날게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제주에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거라고. 만약 당신이 정말로 제주에 친구가 한 명도 없다면 심각하게 생각이란 것을 해보면 좋겠다. '제주 친구'라는 게 하나의 은유라는 걸 당신은 알 것이다. 그리워할 대상,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가슴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다르지 않겠는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불쑥 제주에 가고 싶을 때 떠오르는 친구가 하나 정도 있으면 괜찮은 인생 아닐까. 기회를 줄 테니 이제부터라도 당신도 제주 친구를 만들고 사귀어 두기 바란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본전 생각하느라 여기저기 막 쏘다니기 바쁘면 남는 게 사진밖에 없다.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진득하게 며칠 머물러라. 어떤 장소나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면 거기 머무는 동안 서너 번 한가한 시간에 찾아가라.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시켜먹고 안면을 트고 이름도 나누고 얘기도 조금씩 나누어라. 그러면 기억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가끔 안부를 전해라. 그러다 다시 제주에 갈 기회가 생기면 거기에 꼭 들러라. 제주에 왔다가 생각나서 들렀다고 말하면 안 된다. 여기가 자꾸 생각나서 참다가 왔다고 말해야 한다. 그 생각난 것이 그곳의 메뉴거나 그곳의 분위기이거나 그곳의 햇살이라고 말하는 게 좋다. 그러면 제주 사람은 알아듣는다. 에둘러 말하는 그것들이 모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에게 한결 부드럽고 순하게 대하게 된다. 바라보는 눈빛이 온화해지고 가슴에 들이게 된다. 가슴에 들이는 감정을 관심이라고 한다. 그렇게 관심이 생겨나면 관심권을 써먹고 싶어진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좋은 관심은 배려하는 마음을 먼저 낸다. 불쑥 아무 때나 그 친구를 찾아갈 순 있어도 괴롭히면 안 된다. 나는 훌쩍 떠나온 여행이지만 그 친구는 생업이니까 눈치껏 살펴줘야 한다. 내 생업이 그렇듯이 친구의 생업도 소중하다. 지켜주면 좋아하게 된다. 마음이 열린다. 마음에 들이는 감정을 우정이라고 한다.

      

나는 운 좋게도 제주에 친구가 몇 있다. 새로 사귈 필요도 없이 그들이 제주로 가서 정착을 했다. 한 친구는 애월로 가서 서점을 차렸다. 서울에 있을 때 <디어마이블루>라는 꽃집을 하더니 제주에 가서 그 이름으로 꽃도 팔고 책도 파는 꽃서점을 냈다. 그녀는 그곳이 생업의 현장이라 나는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그녀가 들려주는 서점 손님들 얘기를 듣곤 하다가 뭍으로 돌아온다. 그런 그녀가 <꽃서점 1일차입니다>라는 책을 냈다. 그녀가 들려준 귀여운 손님 얘기가 들어 있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그날도 날이 참 좋은 일요일이었다. 따뜻한 봄기운이 완연해서 역시나 손님이 별로 없겠거니 지레짐작하고 있었는데 문 열기가 무섭게 3팀이 들이닥쳤다. 2팀은 커플, 1팀은 젊은 여자분 두 분이었다. 이런 날 일부러 서점을 온 분들답게 다들 열심히 책을 고르셨고 나는 손님들이 책을 집는 대로 열심히 설명하기 바빴다. 그러다 여자분끼리 온 손님 중 한 분이 “내일은 몇 시부터 여세요?”라고 물었다.

“저희 월요일, 화요일이 휴무라서요.”

“아, 진짜요?”

“네, 죄송해요. 내일 책 읽으러 오시려고요?”

“아니, 그게…… 책을 내일 사려고요.”

“네? 왜요?”

“월급이 내일 들어오거든요.”

순간, 너무나 천진난만하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말에 서점에 있던 모두가 그만 ‘풋’하고 말았다. 나는 들고 있던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훅 들어온, 아이의 ‘용돈’이 아닌 어른의 ‘월급’ 공격이 너무 순수하고 진지해서 도저히 서서 받아낼 수가 없었다. 겨우 진정하고서, “무슨 책을 사시려고요?”라고 물었는데 손님이 고른 책은 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정말 좋은 책이었다. 순간 ‘그냥 줄까?’ 싶었지만 다른 손님들도 있어서 그렇게 말을 꺼내기가 쉽진 않았다.

“사실 저희 서점은 독립 출판물을 소개하는 곳은 아니어서 여기 있는 책들은 다른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서도 다 사실 수 있거든요. 물론 저는 저희 서점에서 구입해주시면 제일 좋긴 하지만 여건이 안 되시면 나중에라도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보세요.”

“아니요, 저 꼭 여기서 사고 싶어요. 다른 책도 더 보고 싶고 그 도장도 받고 싶고…… 근데 저희가 화요일에 돌아가는데 내일이랑 모레가 다 휴무시라고 해서…….”

“음…… 그럼 제가 내일 어차피 꽃시장을 갔다가 정리를 하러 나오긴 해야 하니까, 오실 때 연락을 주시겠어요? 서점 열어드릴게요.”

“정말요? 너무 고맙습니다! 내일 꼭 다시 올게요!”

그 손님들은 물개 박수를 치며 명함을 들고 떠났고 서점에 있던 모두는 한마디씩 거들었다.

“저 제가 계산해준다고 할 뻔했어요.”

“저도요. 근데 너무 귀엽지 않아요? 월급이 내일 들어온대.”

“책을 얼마나 사려고…… 사장님, 일부러 나오시는 건데 많이 파세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서점에서 각기 온 두 커플은 기분 좋게 책을 여러 권 사서 나가시고, 나 역시도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오던 상황과 그 여자분들의 간절했던 표정을 떠올리면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후일담 - 일요일의 월급 소녀들은 다음 날 오후 5시가 넘어서 정말로 다시 왔다. 창가에 앉아 일을 하다가 뚜벅이 여행자들이 저 멀리서 도도도도-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나도 버선발로 달려 나가 반갑게 맞았다. 책은 모두 3권을 샀는데 정말로 월급을 받아 찾아온 것인지 모두 현금으로 계산했다. 다행히 카드사가 다 채가지는 않았었나 보다.     

     


서점 주인장은 이 귀여운 ‘월급날의 소녀들’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책에다 쓸 정도니까. 다시 소녀들이 와도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이미 주인장과 소녀들은 월급날 덕분에 친구가 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친구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거기에 가서도 마음이 닫힌 채로 여행하고, 그곳의 시간이 아니라 그곳의 자신만 사진에 담아 오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마음을 여는 것은 곧 자신의 감성을 깨우는 일이다. 감성이 열리면 관심이 싹트고, 관계는 다시 내 감성을 풍요롭게 만든다.  

  꽃서점 입구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Keep your sensibility for yourself  

주인장이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를 좋아해서 끝 구절을 번역해서 붙여놓은 것이라고 한다.  


바싹바싹 말라 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가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고서는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함이 더해가는 것을

근친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얼 하든 서툴기만 했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에 깨지기 쉬운 결심에 지나지 않았던가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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