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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May 06. 2020

당신은 모르는 이야기

오빠와 남자라는 이분법

2년간 내게 가장 가까운 남자 아닌 오빠였던 그는

그렇게 어느날 갑자기 나의 일상을 침범 해왔다, 자기라는 호칭과 함께.



살다보면 생생히 기억나는 과거의 순간들이 있다. 모든 연애는 할 듯 말 듯 한 순간이 가장 눈부시고, 별 것 없던 잘 기억나지도 않는 자잘한 일상의 대화들이 돌이켜 보면 가장 돌아가고 싶은 그런 순간들이 되어있다. 모든 깨달음의 순간들은 항상 늦는 법이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있어서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그로 인해 깨달았던 과거의 나.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너무 어렵다. 갓 스무살이 되서 6년을 함께했던 그도, 스물둘 여름의 끝자락에도, 스물일곱 타지에서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항상 어렵기만 했다. 어디가 시작인지는 도통 불분명한데 끝만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 이건 참 공평하지 못한 것 같다.








시작은 참 불분명하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오빠로 내 곁에 있었고, 언젠가는 없어질 사람이었다. 그가 계속 나의 선을 넘는다고 해서, 내가 그와 함께 선을 넘을 생각이 있던 것은 정말 아니었다. 오빠가 아무리 문란하게 논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게 있어 강건너 이웃나라 이야기 였고, 그가 내뱉는 야한 이야기들은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다. 스스럼없는 오빠 동생 관계가 좋았던 나에게 오빠는 어느 순간 자기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낮술이라도 한 줄 알았다 뜬금없는 '자기'라니! 우리 자기 기다리다 목 빠진다는 둥, 자기 이렇게 오빠가 외로워 하는데 집에도 한 번 안 놀러올꺼냐는 둥, 그렇게 그는 매일을 졸라댔다. 항상 말은 먼저 거는 쪽은 그였고, 나는 그저 묵묵히 '브로'로 답해 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난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이게 그가 수많은 여자들과 함께 한 수법이었다는 것을. 




자기. 그건 그를 더 가까운 사람으로 느끼게 한 호칭이었고, 어느 순간 나를 정신 못차리게 했던 호칭이었으며, 그가 그 호칭으로 나를 더이상 부르지 않던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애매하던 우리의 관계가 끝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게 팔베게를 해 준 채로 세상에서 가장 애매한 관계가 싫다고 문득 이야기하던  그의 앞에서 나는 감히 우리보다 더 애매한 관계가 어디있어라는 질문을 차마 한번도 던지지 못했다. 그의 품에서도, 그와 키스를 하면서도, 엔조이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오빠 동생 관계도 아닌 세상 제일 애매한 관계는 우리였는데. 다른 사람 다 건들여도 그냥 나만은 아끼는 동생으로 그냥 옆에 놔 둘 수는 없었던 것일까. 나만 계속 선을 지켰다면 우리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 될 수 있었을까.




늦은 퇴근길 느닷없는 전화와 함께 날 데리러 우리집에 오곤 했고, 나는 망설임과 이성의 끈을 붙잡고 그의 집에 가길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그가 남자가 아닌 내 제일 친한 오빠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다. 끝까지 선을 지킨 채. 우연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항상 타이밍이 좋질 않았다. 항상 집에 일찍 가있던 그와 항상 저녁 약속, 술 약속으로 매일 밖으로 나돌았던 그 때의 나. 술이라도 한잔 하고 집에가며 답장하지 않은 메세지를 볼 때 쯤이면 그는 이미 잠자리에 든 후였다. 한번은 결국 집으로 가는 택시를 그의 집으로 돌린적도 있었으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또 어긋나는 우리의 타이밍에 너무 고마워 했던 기억. 다음날 그는 그의 집에 정말 오고싶었냐며 자신의 섹시함을 인정하라고 남산만한 배를 통통 두드리며 날 웃겼던 기억. 어쩌면 그의 그런 뻔뻔하리만치 솔직한 모습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서서히 넘어가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한 때 홍콩 출장 중이던 그는 소개팅남과 영화를 본다는 나의 이야기에, 영화 다 보면 술 마시러 갈 꺼냐며, 해피엔딩이냐며 스스럼 없는 우스갯 소리를 날리고, 난 그에게 부디 내 몫까지 홍콩에서 해피엔딩 해 달라며 쿨하게 그의 행복한 밤을 빌어줬었던 우리의 관계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오빠라는 의미로서는 그는 나에게 한 없이 무거운 사람이었지만, 남자라는 의미로서는 나한테 그만큼 가벼운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나의 오빠와 남자라는 이분법 구별체계를 무너트리기 전까지는, 그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 전까지는 그와의 대화를 질투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할 수 있는 내가 있었다. 




각자의 일상에 서로의 존재가 익숙해져 갈때쯤 각자 떠난 여행길에서 함께 여행한 사람들이 내가 핸드폰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때면 누구랑 연락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그렇게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고있었다. 나는 다정하게 애정을 담아 그에게 답장하곤 했고, 이 모습이 그에게도 보이기는 했는지 그는 더 많은 애정표현을 갈구 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켠에서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거다. 연애할 생각도 없는,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 그. 사귐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을 것임을 알기에 시작하는 것이 두렵고 싫다던 그. 어짜피 헤어짐으로 끝날 만남이라면 구태여 시작하지 않겠다고. 그의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없어졌다는 그였기에, 그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온 한 사람으로서, 나만 상처투성이가 될 이 관계를. 그래서 자기가 없어 외롭지 않냐는 그의 말에도 나는 개미똥만큼 외롭다고 대답하곤 했고, 그는 개미가 참 똥을 많이 싼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와서 안아준다며 그렇게 그를 더 만나고 싶고, 보고싶게 만들곤 했었다.




자기라 부르며 일상을 공유하고, 함께 있고 싶어하고, 함께 있어 줬으면 하고, 보고싶다고 했던 그를 내가 남자이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오빠건 어떤 의미가 되었던 좋아하는 구나라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했던 그 무렵, 그 해의 마지막 한 달은 가장 아프게 기억된 한 달 이었다. 그는 친한 오빠로서 내가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 내가 남자로서 묶어 둘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길은 그가 나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기 전에 내가 그에게서 멀어지거나 그를 잘라내는 수 밖에 없었다. '먼저'라는 것을 잘 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는, 먼저 거절하지 못했기에 결국 혼자 남았고, 먼저 잘라내지 못했기에 상처를 받았고, 이 모든것은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고 그저 그가 좋아 망설이기만 했던 나의 잘못이었다. 




방안 공기가 안좋다는 나의 말에 그가 구입했던 공기청정기, 그의 인간냄새 물씬나는 뱃살을 빼기위한 체중계, 한창 빠져있던 노래를 듣기위한 베이스 빵빵한 스피커, 거실을 위한 아늑한 조명. 그렇게 나의 조언으로 늘어가는 그의 살림살이가 좋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드는 그의 따뜻한 팔도 좋았지만, 별 다르지 않은 어느 아침 출근길 샤워를 마치고 출근준비를 끝낸  그가 소파위에 널부러져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키스해주며 출근하자고 안아주던 그 순간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의 가장 다정한 모습이었다. 잠깐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온기를 갈구하듯 날 안고있던 그의 모습. 여자의 감은 참 무섭다고들 하던가, 나는 그 순간 행복했지만 동시에 왠지 다시는 그와 함께하는 이러한 순간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고, 나의 예감은 슬프게도 맞았다. 그의 집에서 함께한 약 두 달의 시간, 그리고 함께 보낸 수많은 밤동안 나를 그를 좋아하고 원하면서도, 그를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었고, 우리는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쉽게 보고있을 그를 향한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벽이었다. 




그가 영웅담처럼 풀어놓는 과거의 연애 이야기를 그의 품에 안겨 재밌게 들으면서도, 질투라는 감정은 또 없었다. 오빠의 이야기에도 금기는 있었다, 그는 그의 상처를 좀처럼 내 보이지 않았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린 그 시점에서도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고, 사람이 한 사람과 결혼을 결심하려면 도대체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를 그를 보며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오빠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가까이에서 망가져만 가던 그의 모습을 봐왔었던 나였기에, 그를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워 했었고, 다른 모두가 그가 너무 막 산다며 멀어져 갈 때에도 나는 그와의 거리를 좀 처럼 포기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그를 연민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는 내게 있어 내가 더 멀리 할 수도, 내가 더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냥 그 자리에 그가 변했던 안 변했던,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간에 그저 오빠를 아끼는 한 명의 동생, 한 사람으로 있어주고 싶었던 거다. 비록 그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과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그 한해의 마무리.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브로. 라고 시작하는 나의 메세지는 한단락 이었지만, 술에 취한 와중에서도 그의 행복을 몇 번이나 빌었던지. 집에 예쁜 가구를 놓건, 예쁜 여자를 데려오던 그 허무함과 공허함은 여전하겠지만, 당신의 새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이제 덜 외로워 하고 내년에는 행복한 모습 좀 보여달라며. 나는 더 이상 오빠에게 줄 것이 없다며, 애정 관심 마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오빠한테 다 줬다고. 애정하는 우리 오빠 한해 잘 마무리 하라며. 내가 그 시점에 오빠한테 할 수 이는 고백은 좋아한다, 사랑한다도 아닌 애정한다는 표현이 정말 적절했다. 동생으로서도, 여자로서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누구도 우리가 함께였단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함께였고, 사귀지 않았으니 헤어질 일 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좁은 섬 나라에서 소식은 전해듣지만 더 이상은 연락하지 않는사이. 끝은 언제나 슬프고, 내 옆에 있던 사람 한 명을 자의였건, 타의였건 잃는 다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다. 




마음을 끝내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를 좋아했다는 고백이었고, 나는 그렇게 어중간한 실연이 아닌 그와 진정한 실연을 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3년 후, 모르느니만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그가 내 직장 동료가 되어 나타난건 그 어느 누구도 예상 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겹쳤던 이직으로, 같은 회사 다른 오피스에서 함께 일 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매일 매일 오고가는 사내 챗 속에서는 아무도 모를 그저 옛 이야기. 갑작스럽게 닥친 당황스러운 상황앞에서 나와 당신은 그저 반갑게 포옹하고, 우리 원래 친한 사이였다며 어설픈 미소로 얼버무려야만 하는 그런 오늘을 잘 버티고 있는건 정말 시간의 힘일지도. 그래도, 이젠 오빠가 한 결 덜 아파 보여 다행이야, 상처는 다 아물었기를, 그리고 이젠 정말 행복만 하기를. 그래도 당신이 가르쳐 준건, 누군가를 안쓰러워 하는 마음과 곁에 있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결국 모든 건 지나고나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 당신은 모를 그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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