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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Apr 20. 2020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외로움

그는 나에게 있어 발신이 아닌 착신이었다


그와는 언제부턴가 긴 통화를 하곤 했다. 인터넷과 SNS 어플이 발달한 요즘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길게 하는 일은 그 당시에도 드물었기에 나의 통화목록의 가장 많은 착신 이력의 주인공은 다시 그였다. 늦은 밤 술 한 잔 걸치고 아쉬운 채로 집에 들어가는 택시 안이나, 길거나 짧은 여행을 끝마치고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 그는 항상 전화를 걸어왔다.




어디야, 뭐 하고 있어
자려고 누웠어?




방금 도착했다며 여행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그는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나에게 무심한 듯, 혼잣말을 하는 듯 털어놓곤 했고, 나는 즐겁게 맞장구 쳐주며 귓가에 나지막이 와 닿는 그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하루의 끝, 그가 내게 공유해 준 그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그저 좋았다. 그는 나에게 있어 발신이 아닌 착신이었다. 내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는 없었고,  그는 느닷없이 연락하는 데에는 선수였다.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내 맘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줄만 알았다. 어디까지나 연락이 와서 답장을 하는 것, 딱 그 정도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가끔은 바보스러울 만큼 어리석다는 것. 그래서 그와의 연락이 끊겼던 그 당시 난 참 많이도 아팠다. 누군가를 잃을 준비를 하는 방법도 몰랐던 당시의 여린 나는, 언젠가부터 항상 기다려졌던 그와의 연락을 그리워했고, 아직 준비가 안 된 나를 두고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나의 일상에서 쏙 빠져나가버린 그가 미웠다. 그의 부재로 나의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리기만 했다.



그를 빼고선 이야기할 수 없는 그 해 더운 겨울, 그가 나의 착신뿐만이 아닌 나의 발신이었다면 나는 좀 덜 슬프고, 덜 미련이 남았을까. 사람이 사람에게 먼저 끊임없이 연락을 하는 것에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걸까. 그 당시만 해도 관계에 있어서 소심한 겁쟁이였던 난, 단 한 번도 그에게 뜬금없는 전화를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목적 달성을 위해 나와의 의미 없는 연락들을, 우스갯소리들을 주고받았던 것이지, 아니면 나와 공유하는 일상 속에서 그도 편안함과 안정을 찾았던 것인지,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건, 그는 참 많이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 그렇게 라도 혼잣말 형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아야만 했고, 어떤 목적이 되었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연락할 정도로 그는 외로웠고, 나는 무의식 중에 그의 외로움에 동요되었었다는 것. 그랬기에 알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 그의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는 것. 그에게는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그 누구와 공유해도 똑같았을 일상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이 그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 내가 정말 그를 맘속에 담았었고, 어떤 의미가 되었건 좋아했다는 걸 깨달은 건 한 참 후의 일이었다. 모든 깨달음의 순간들을 항상 늦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의미 없을 수 있는 숱한 착신의 순간들을, 발신으로 답하는 것만이, 나의 마음에 대한 예의인 것을. 자연스레 마음이 가는 일을, 발신하지 않는 것 만으로 막을 수 없듯, 마음의 시작은 밀고 당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관계가 확실하지 않아도, 좋으면 좋은 거라고 표현해 주는 것, 보고 싶다면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고, 만나고 싶다고 하는 것.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낌없이 표현하는 것, 마음은 확실할수록 확신이 되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상을 궁금해하고, 함께 나눠주는 것. 매 순간 부끄럽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 더 좋은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보다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시간들.


그래서 나의 이번 통화 목록은 당신을 향한 발신으로 채워져 갔다.

나의 길고 지루한 한 주의 끝에 소소한 일상을 잠시나마 나눌 수 있는 당신이 있어 참 좋았다고.

조곤조곤 나지막한 너의 목소리로, 너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이 좋았다고.


이번에도 한 발 늦은 깨달음이었고, 어긋날 수 밖에 없는 마음이지만 

오롯이 내 마음에 대한 예의를 다 해보고 싶었다고

그럼 이 끝에 조금은 덜 아프고, 덜 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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