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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콤보 May 04. 2022

나의 첫번째 사이드잡 실패기

응답하라 2011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그러니까 2011년의 이야기다. 


기나긴 취업준비생 시절을 지나, 드디어 원하던 회사 중 한 곳에 입사한 당시 나는 2년 차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에 여전히 허전함이 있었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유머사이트를 만들었고, 운영하면서 웹마스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었고, 이 경험이 컴퓨터공학도로의 진로선택까지 이끌어 내었다고 지난 글 "컴퓨터 공학도의 탄생"에서 이야기했었다.


IT직무로 입사한 회사에서 나의 업무는 행정이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이 IT 관리업무였는데, 이 관리업무라는 것이 내가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업무가 아니다 보니 직무에서 창의력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지경이 아니라 발휘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저 관행대로 매번 반복하는 업무, 위에서 주어진 업무처리의 연속이었다. 


흥미롭게도 당시 국내에도 스마트폰 태동기가 도래했고 Apple 앱스토어가 나에게도 위대한 혁신으로 다가왔다. 이 혁신이라는 것의 의미는 드디어 개발자들도 아이디어 하나로 돈 버는 생태계를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시 꽤나 많은 개발자들이 직접 앱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열망이 있는 예비 개발자였다. 예비 개발자라고 칭한 이유는 본업에서 코딩을 하지도 않고, 사이드로 한다고 해도 당장 코딩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나름 게임도 개발해 보고, 학과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에 나만의 프로덕트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컸다.(그 당시엔 프로덕트란 용어도 쓰이기 전이긴 하다) 다행히 나의 큰 열정이 일단 배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당시 부상하던 앱 개발 방법론이 바로 요즘엔 대세가 된 '하이브리드 앱 개발'방법이다. 회사에 5일간 휴가를 내고 삼성 SDS에 개설된 '하이브리드 앱 개발 과정' 1기 풀타임 교육에 참여했다.


당시는 Android와 iOS를 각각 Java나 C#으로 개발하여, 네이티브 앱을 각각 만들어내던 시기였는데, 이럴 경우 원소스 멀티유즈가 불가하니 하이브리드 앱 개발 방식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방식은 Web앱을 제작한 뒤 껍데기만 Native 코드로 감싸 것인데, 당시 JqueryMobile 등 베타 버전의 프론트엔드 기술들과 PhoneGap처럼 앱을 감싸는 SaaS 서비스들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네이티브 앱처럼 성능이 좋지도, 사용자들에게 자연스럽지도 느껴지지도 않아 초기엔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았다.


등록한 하이브리드 앱 개발과정 자체가 처음 개설된 것이고, 국내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교육을 1기 수강생이 되어 처음 수강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막 대두되던 신기술이라 교육을 다 받고 나서도 당장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 이제 앱을 만들 수 있겠다'가 아닌 '아 이제 하이브리드 앱을 만들기 위해 뭘 어떻게 공부하면 되는지를 알겠다'정도였다.


여차저차 첫발을 떼었으니 그래도 앱을 제작하는 것에 착수를 해야 하긴 했으나 역시나 매일매일이 배움의 연속이긴 했다. 정식 출시되지도 않은 베타 버전의 해외 라이브러리들을 영문으로 읽어 가며 맨땅에 삽질하듯이 개발을 시작했다. 


이 즈음 아이디어 노트를 하나 만들고 좋은 사업계획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해두는 습관을 길렀다. 때론 노트에 적힌 아이디어를 다시 보며 살을 붙이면서 이 계획이 실행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중 가장 사업성이 있겠다 싶었던 '돈워리사이즈(Don't Worry Size)'를 골라 앱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돈워리 사이즈는 온라인에서 옷을 살 때 가장 고민하는 포인트이면서, 구매 결정 전 마지막까지 체크해야 하는 허들 같은 존재인 사이즈 고민을 없애기 위한 비즈니스였다. 요즘엔 많은 커머스 앱들이 이런 Pain포인트를 해결하며 성장해오고 있지만 2011년의 아이디어임을 상기하자.

앱은 이렇게 동작한다. 

1) 앱을 실행하여 가입한 뒤 키, 몸무게, 허리사이즈 등 내 신체사이즈를 입력하면 

2) 나와 가장 비슷한 체형의 피팅모델을 랭킹 순으로 보여주고, 

3) 모델 정보에 해당 모델이 활동하는 쇼핑몰로 이동하는 링크를 포함하여 유저가 쇼핑몰로 넘어가는 Traffic을 기록했다가 

4) 쇼핑몰에 정기적으로 CPC 과금하는 구조의 사업이었다.

5) 유저는 이렇게 넘어간 쇼핑몰에서 해당 모델이 입은 옷의 그 사이즈를 그냥 사면된다.


이는 필자가 실제 경험한 불편에서 비롯된 사업 아이디어였는데, 키가 큰 체형 덕에 옷을 사면 하나같이 바지 기장이 짧거나, 소매가 짧았다.

이는 특히나 남성 온라인 의류시장이 규모가 작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온라인 남성 쇼핑몰들은 표준체형과 위아래 한 개 사이즈 정도만 만들어 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렇게 S, M, L사이즈의 의류가 출시되었다고 하자. 예를 들어 키가 183 이상인 사람들이 L사이즈를 구매하면 애매하게 소매가 짧고, 167 이하의 사람들이 S사이즈를 구매하면 애매하게 옷이 커서 핏이 이상한 식의 불편이 생긴다. 사실 이들을 위해 쇼핑몰에서 XL나 SS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이 사이즈를 만들어도 타깃 고객의 숫자가 많지 않아 재고 위험이 있다. 그러기에 보통 S, M, L 사이즈만 출시해 버리거나 S를 어중간하게 작게 만들거나 L을 어설프게 크게 만들어 다른 사이즈의 고객을 흡수하려고 시도했다.


온라인에서 옷을 사는 게 힘들었지만 반면에 오프라인에서 옷을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내 사이즈 같은 경우 세일 품목은 바라지도 않았고, 신상의 경우에도 재고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온라인의 시장논리는 사실 오프라인 논리에서 비롯된 것일터였다.


어찌 됐건 아이디어 노트에서 시작된 사업계획은 간단한 기획안 PPT로 제작되었고, 해당 PPT를 첨부하여 국내 쇼핑몰 50여 곳 이상에 이메일을 보내 사업 제휴 의사를 타진했다. 그중 몇 곳에서 회신이 왔는데 놀랍게도 한 곳은 지금은 '런던 슬랙스'로 이름이 바뀐 '(구) 멋남'이었다. 남자의류 쇼핑몰 업계 상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고, 미팅을 위해 퇴근 후 구로디지털 단지로 향했다. 


저녁 7시쯤 멋남의 사무실에 찾아간 나는 이렇게 나의 첫 비즈니스 미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 후 와이어프레임(기획안) PPT를 보며 앱이 작동하는 프로세스를 설명하였다. 미팅에 참여한 마케팅 팀장님은 흥미로워하시며, 멋남은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하는 편이라며 단숨에 진행해 보고 싶다고 하셨다. 이렇게 쉽게 성사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속으로 기뻐하며, 추후 전달받을 모델 데이터 양식을 정의해 드릴 테니 연락을 기다려 달라고 하고 미팅은 잘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지만, 동시에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는 앱을 개발하는데 시간을 쏟아야 하는데 이렇게 쇼핑몰 한 군데를 하루 저녁을 소비하면서 돌아다니게 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돈워리사이즈는 모델 데이터가 핵심 콘텐츠라서 다양한 쇼핑몰들의 참여가 중요하고, 그중에서도 표준체형에서 벗어난 모델들의 데이터를 더 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용자들이 본인의 체형과 동떨어진 모델을 추천받게 되면 이탈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대한민국 전체형을 커버할 수 있는 모델 데이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쇼핑몰들의 체형은 다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키작남', '빅사이즈 몰'들의 쇼핑몰의 영업에 더 치중해야 했다.


이런 찰나에 신기하게도 마침 이일을 해결해줄 적임자에게 이메일로 연락이 왔다. 마케팅 회사 A이사라는 이 사람은 **쇼핑몰 협회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민국 일정 규모 이상의 쇼핑몰 상당수가 가입되어 있고, 본인의 친인척이 협회의 간부라고 하였다. 또한 협회의 공식 지정 마케팅 회사가 바로 자기 회사라서 일도 많이 수주받아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저녁 올림픽공원의 한 커피숍에서 우리는 의기투합하기로 뜻을 모았다. 난 개발에 전념하고, 제휴 및 데이터 수집을 A이사가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날 이후 기쁜 마음으로 개발에 전념할 수 있었다. 퇴근 후 매일 혼자서 서너 시간씩, 그리고 주말엔 하루 10시간 넘게 코딩과 씨름하며 앱을 개발하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A이사에게 데이터 수집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물었고, 아직 진행 중이니 기다려달라 하였다. 다시 앱이 90%쯤 완성된 한 달 반쯤 지났을 땐 테스트에 활용해야 하니 현재까지 취합된 데이터라도 일단 받고자 전화를 걸었다.


진행상황을 물는 나의 질문에, 아직도 큰 진전은 없어 보이는 듯했다. 전달할 만한 데이터가 아직 없고, 시간이 걸리는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지난 통화에서도 못마땅했었던 나는 이번 통화에선 살짝 불편함을 드러내었고, 그걸 인지한 A이사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럼.. 뭐 그만합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었고 몇 마디 이어지다 통화는 끝이 났다. 그만하자는 말에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었지만 한편으론 이 사람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시원하게 화를 내지도, 수습을 위한 대화를 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당황한 채로 통화를 끊게 된 것이다.

그냥 나 혼자 루저가 된 느낌이었다. 삼성 SDS에서의 교육에서부터 시작된 3달여의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가며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골방에 박혀 노트북과 씨름하며 보낸 시간이 후회스럽게 느껴지며 꽤나 강력한 현타가 왔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책상 위의 맥북을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배신감에 더해 이 사람이 내 아이디어를 활용해 직접 사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무기력해졌다. 그 뒤로도 한동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여 시간이 지났을 즈음 페북 피드에 해커톤 행사가 보여 신청했다. 이때쯤 현자 타임이 끝나고 마음이 추슬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세 달간의 학습과 쓰라린 경험이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포기하고 접을 순 없었다. 지난번을 일을 돌아보며 실패한 원인 분석을 하며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되었다.


첫째는 비즈니스 모델을 너무 크게 잡은 게 문제였다. 돈워리사이즈는 창업자가 직접 경험한 불편과 좋은 아이디어가 덧붙여진 탄탄한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생각에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접근했다. 프로덕트를 MVP, Beta, 정식버전으로 나누고 각각의 버전에서 담아야 할 기능을 정의한 뒤 스텝별로 접근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는 제휴 범위에서도 적용되었어야 했다.

둘째는 MVP에서는 최소한 내가 기획, 개발, 제휴를 모두 담당했어야 맞고, 모델 데이터도 구하기 쉽고 실제 유저층이 두꺼운 표준 사이즈에만 일단 집중했어도 됐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너무 믿었다. 창업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어려운 건 여전히 사람이다. 창업 꼬꼬마 시절도 되기 전 걸음마 단계였던 이때는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이 모두 나의 영원한 팀원이 될 것 같은 착각 속에 있었고, 특히나 업계의 특정 위치에 있다기에 더욱 신뢰하며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일을 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물론 아이디어 보호 서약서를 받아놓긴 했으나 맘만 먹으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2011년의 나를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만약 지금의 내가 2011년의 나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2011년의 여러분이 기억나셨나요? 당시 힘들어하던 여러분이 기억난다면 그때의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시고 싶으신가요?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과거의 나의 모든 경험이라고, 힘들 땐 한 번쯤 쉬어가도 괜찮다고, 하지만 포기하지는 마. 늙어서 후회할 테니까..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마음을 추스르고 참가한 해커톤의 이야기는 다음 글로 이어가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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