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찾아 삼만리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개봉하고 바로 다음 날, 난생처음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봤다. 크루아상을 사러 갔다가 어떤 분이 "어 당신 그 영화에서 그 사람 같은데..."이러시더라. 거기서부터 서서히 반응들이 바뀌었다. "어 당신 그 영화에서 그 사람 같은데..."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그 여자 닮았네요," "에밀리 블런트 닮았네요," "혹시 에밀리 블런트에요?" 그리고 "당신 에밀리 블런트지!"로 진화하던게 무척 신기했다.
남자 배우 중 나의 이상형이 마크 러팔로라면 여배우 중 나의 걸 크러쉬는 단연코 Emily Blunt 에밀리 블런트다. 아름답고 우아한데 시원시원한 마스크에 자신감 넘치고 카리스마도 넘치는 그녀. 액션도 되고 멜로도 되고 시대극도 되는데 웃기기까지 한다. 립싱크 배틀에 나가서 절묘한 퍼포먼스에 섹시 댄스까지 추는 마력의 무대매너를 선보이는 반면,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함께 작업했던 톰 크루즈를 당황시킬 정도로 토크쇼에서 촬영장 비화도 맛깔나게 이야기하는 여배우다.
마블사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전 세계 영화판을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에밀리 블런트는 사실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블랙 위도우'나 헤일리 앳웰이 연기한 '페기 카터'의 역할을 맡을 배우로 물망에 올랐었다. (다른 영화 계약 때문에 결국 물 건너갔지만 이 캐릭터들을 맡은 여배우들이 너무 잘 어울리니 블런트는 그냥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현재 마블사는 MCU (Marvel Cinematic Universe 마블 영화 세계)의 제 3단계를 발표하였고, 앞으로 개봉할 여러 작품들 중 하나는 새로운 여성 슈퍼히어로를 선보일 <캡틴 마블>인데, 바로 블런트가 이 주연을 꿰찰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중이다. (또 다른 후보는 캐나다 TV 시리즈 <바이킹>의 여주인공 '캐서린 윈닉'이라고 역시 매력적인 배우다.) 본인 말로는 마블사에서 그 어떤 이메일, 문자, 전화 한 통, 심지어 귓속말도 없었다지만... 어찌 되었건 어느 여배우가 주인공이 될지는 올해 여름 혹은 가을에 정식 발표가 난다고 하니 꽤나 설레는 소식이다. 한편 블런트는 미국 시트콤 <오피스>의 여성팬이라면 꼭 한 번쯤은 빠졌을법한 '짐 핼퍼트'를 연기한 (실제로도 '짐'과 매우 비슷하게 재밌고 멋지다는) 훈남 배우 존 크래신스키를 사로잡은 여인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 어릴 때 나는 정말 촌스러운 놈이었다. 젊은 시절 카사노바처럼 지낸 적도 전혀 없었다. 실제 내 젊은 시절은 많이 달랐고, 내 생애 최고의 날들은 내 아내를 만난 날 시작되었다. 진심이다.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가장 멋진 사람들 중 한 명이며 재능도 타고났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나에겐 정말 벅찬 사람이다. '나의 단 한 사람'을 만날 정도로 운이 좋다면 인생은 최고점을 향해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것보다 더 나은 건 없다. - 미국 시트콤 <오피스> 출연 배우이자 에밀리 블런트의 남편, 존 크래신스키
현재 곧 태어날 둘째를 기다리고 있는 크래신스키-블런트 부부. 배우 남편이 기자들 앞에서 아내 칭찬을 저렇게 혀내두르듯이 할 정도라면 금실 좋은 부부인 건 분명한듯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얄밉고 앙칼진 선배 비서가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군대를 이끌며 외계인과 맞서 싸우고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에서 마약 조직을 쫒는 강인하지만 연약하고 복잡 미묘한 FBI 요원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한국 관객들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이 몇몇 작품들로 그녀를 배우로서 단정 짓기에는 좀 억울하다. 그만큼 어느 장르에도 어울릴만한 매력적인 외모에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에밀리 블런트이지만 그녀도 화려한 시절 이전에 한 때는 쓰라린 고충을 겪었었다는데...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열두 살, 열세 살 정도 되었을 때 정점을 찍었었다. 사람들과 말하는 게 너무 무서워서 한 마디도 안 했다. 그 나이 때는 특히 애들이 참 잔인할 수 있지 않은가. 대부분 아이들은 말을 잘만 하니까 또래 친구가 말 못 하는걸 이해 못했었다.
그렇다. 훗날 배우가 될 사람이 어릴 적에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말더듬이였던 것이다. 영국의 왕 조지 6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을 더듬는 게 사람을 얼마나 답답하고 속수무책하게 만드는지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부유한 영국 집안에서 자란 블런트는 말더듬이라는 치명적인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벗겨지지 않는 구속복을 입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유독 모음을 발음하는데 그렇게 힘들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이름은 모음 E로 시작하는 EMILY였으니, 이는 지옥과도 같았다. 기본적인 대화조차 하지 못했던 블런트는 그 누구의 시선으로도 각광받지 못했다. 그녀는 왜 그렇게 의사소통하는 것이 힘들고 불가능했을까.
어떻게 해서 말을 더듬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나는 제대로 말하고 싶어 애가 탔다. 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어린아이였는데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쫓기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신과 이렇게 얘기하듯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했었다.
말더듬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유전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 블런트의 일가친척 중 할아버지, 삼촌, 그리고 사촌이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신기한 사실은 남자아이에 비해 여자아이가 말더듬을 극복할 확률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언어능력과 화법 차이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대처와 반응의 차이도 있다고 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말을 더듬는 여자아이에게는 동정 어릴 테지만 말을 더듬는 남자아이에게는 오히려 핀잔주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한들 남자아이가 아예 말더듬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니고 여자아이가 말더듬의 고통을 비교적 덜 느낀다는 것도 아니다. 블런트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고 깔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에 맞서 그녀의 부모님은 딸의 말더듬을 줄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화법 코치도 만나고 이완요법도 해보고 돌고래 소리도 들려주고 심지어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마치 최면을 거는듯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도 들려주었다. 그녀가 말하길, "아 그 목소리 정말 생생하게 기억해요! 생각만 해도 웃기네요. [성대모사하면서] '당신은 아름답고 반짝이는 하얀 모래 위에 서있어요.' 풉, 효과 없었어요. 그냥 짜증 났어요. '나 긴장 안 했다고!' 아무리 속으로 소리치고 발버둥 쳐도 더더욱 긴장되는 거 있죠. 최악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맥케일 선생님'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고선 기상천외한 제안을 했다: 학교 연극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론 그녀는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물론 "아니요"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어 고개만 미친 듯이 좌우로 흔들었다. 느닷없이 그가 NO라는 말도 똑바로 못 하는 여학생에게 연극을 권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친구들 앞에서 성대모사를 할 때는 말을 곧잘 하는 듯해서였다. 맥케일 선생님은 블런트에게 연극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목소리로, 다른 억양으로 대사를 전달해보라고 말했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눈 딱 감고 믿어보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말을 더듬는 분도 아니었는데 기가 막히게 문제의 핵심을 꼽아내셨다. '다른 사람이 되어라'라니. '너를 너한테서 떼어내라'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우스꽝스럽게 형편없는 영국 북부지역 사투리였지만 놀랍게도 난 그걸로 15분 동안 한 번도 더듬지 않고 대사를 쳤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됐었다. 연극 내내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시며 내 어머니께서 가장 감동받으셨던 것 같다. 그게 제일 의미 있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지역 발음과 억양을 넘나들며 말을 좀 더 자유자재로 하게 된 그녀. 넘지 못할 산을 슬금슬금 넘어가고 있었다.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으면서 말을 잘할 수 있는 이런저런 요령도 터득했다. "말을 잘 해야 하는 직업을 갖게 될 거라곤 요만큼도 생각 못했던 나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배우] 일을 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14살 즘에 가까스로 말더듬을 극복한 블런트. 재밌게도 그녀의 치명적인 말더듬이 그녀를 연기의 무대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어릴 적 맥케일 선생님 덕분에 연극에 선 이후 바로 배우의 꿈을 꾼 것은 아니었지만 (말더듬을 극복하는 게 우선순위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특별활동으로 연극을 꾸준히 했었다. 현대 언어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그녀는 UN의 통역사 같은 직업을 꿈꿨었는데 어느 하루 연극 선생님이 '에든버러 연극제'에 참여할 연극에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응한 블런트는 고등학교 연극부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세계적인 연극제에서 공연을 했고, 그녀의 공연을 본 어느 매니저가 다가와 '너는 연기로 먹고살 수 있을 거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블런트가 고작 17살 때 만난 이 매니저는 지난 16년 동안 그녀와 함께한 현재 영국 연극영화계 매니저이다.
지금까지도 [말더듬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처럼] 새로운 연기를 할 때마다 색다른 목소리나 억양을 연구하곤 한다. 걷는 거라든지 몸동작이라든지 목소리든지 말투라든지 뭐든 바꿔가면서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실은 완벽하게 말더듬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블런트는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때 가끔가다 말을 더듬는다고 한다. 배우로서 두렵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전화통화를 할 때 아무래도 목소리 하나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말더듬이 돌아온다. 특히 첫 아이를 임신했었을 때 말더듬이 유독 심했었다는데 배가 점점 부르면서 횡격막이 막히고 몸이 불편해지니 말더듬 증세가 악화되었다. 드라마틱하게 좀 더 의미 부여하자면 아무래도 엄마가 된다는 부담감도 무의식적으로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블런트 외에도 말더듬이였던 공인들은 꽤 있다. 배우 브루스 윌리스, 안소니 홉킨스, 그리고 미국 부통령 조 바이든도 말더듬이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 에밀리 블런트는 이러한 공인들을 대표하여 말더듬이들을 위한 치료수단을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 "American Institute for Stuttering (AIS)"의 이사회 인원 중 한 명으로 활동 중이다. 블런트가 말하는 AIS의 장점은 원효대사 해골물같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말더듬이에게 본인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시선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누군가 AIS에서 치료받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묻더군요, '말더듬는게 언제 최악으로 심하냐'고. 그러더니 그 아이가 그 사람 말을 고쳐줬어요, '아니요, 아니에요. 말더듬는게 언제 최고로 심하냐죠'라고. 최악도 최고로 보는 마음. AIS는 이 아이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American Institute for Stuttering 2009년 자선 행사에서 --
AIS는 꾸준히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어둠 속에 감추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의 말을, 당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도 들을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어렸을 적 저는 항상 바로 이것 때문에 몸부림쳤었습니다. 제 입으로 제 말을 하려는데 제 자신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했었고 말더듬에 대한 원인도 모르니 그 어떠한 소통도 막막했습니다. [말을 더듬는 데에는] 분명한 과학적 이유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렸을 때 그런 상식은 전혀 도움되지 않았습니다. 항상 저는 전쟁터에 나간 기분이었고 넘지 못할 산이 저를 짓밟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제 안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맥케일 선생님 덕분에 연극을 하고 난 후] 점점 좋아졌지만 정말 오랫동안 제가 말더듬이라는 사실이, 말더듬이 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말더듬이 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할 일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제 안에 살고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오히려 새로운 길을 보여주어서 고마워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제 인생은 하루하루가 맥케일 선생님의 연극반이니까요. 오늘 밤 함께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세상에는 함께 나눌 이야기가 끝도 없어서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싸움을 계속하시고 이에 승리하신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제게는 너무 감동적인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지 6세처럼 대중에게 연설을 해야 할 왕도 아니었고 다 큰 어른이었을 때도 아니었는데 에밀리 블런트처럼 어린 나이에 말을 더듬었던 것이 뭐가 대수인가 라고 여기는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 힘든 시간을 겪는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시기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더 힘들고 누가 더 아팠는지를 재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조건 본인이 제일 어렵거나 어려웠다고 얘기하는 것도 억지다. 중요한 건 개개인마다 겪게 된 역경을 어떻게 극복해내고 정복했느냐는 것이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조지 6세, 그는 그대로, 에밀리 블런트, 그녀는 그녀대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거다. 어린 나이에 학교 아이들이 짓궂게 놀려대는데도, 한참 다른 사람 시선이 신경 쓰일 어린 소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통해서 말더듬을 이겨냈다는 게 그녀의 입장에선 기적과도 같다. 충분히 손뼉 치고 환호해줄 만한 성공 이야기다.
아름다운 카리스마, 배우 에밀리 블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