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삶은 오뚝이 그 자체였다. 외할아버지의 갖은 학대에 가출을 한 뒤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신 엄마.
하지만 결혼 후 이어진 고생에 비하면 '새발의 피'수준이었다.
오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오빠는 백일 무렵부터 시작하여 15살까지 지금은 아토피피부염이라고 불리는 피부병을 앓았다. 지금이야 약도 있고 치료법도 있지만 그 당시엔 정확한 병명도 없었고 치료법도 없었기에 양ㆍ한방으로 치료를 했다.
좋다는 약 좋다는 음식은 다 먹였고 피부에 좋지 않다는 생선종류도 입에 대지도 못하게 했다.
오빠가 피부병이 낫게 된 계기는 동네아주머니가 알려주신 민간요법 때문이었는데 까마중이라는 풀이 있는데 그 뿌리를 달여서 목욕을 하고 약으로 마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 민간요법이 오빠에게 맞았던 건지 아니면 그동안 먹었던 약들이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인지 그 이후로 오빠의 피부병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훗날 오빠가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현역 1급으로 가게 되어 엄마는 대견함과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오빠가 피부병에 차도를 보이기 시작할 즈음 엄마의 고난이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빠의 위 수술이었다. 고아로 혼자 지내게 되면서 제대로 식사를 챙길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위를 2/3나 드러내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다섯이나 되는 자식에 오빠의 병까지 월세방을 전전하던 때다 보니 병원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TV를 비롯한 돈이 될만한 가전을 팔아서 병원비에 보탰다.
다행히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많은 지원을 해 주셨고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많이 듣던 말인데 '살만하니까~'
라는 말이 있다. 고생은 다 끝나서 이제 좀 살만하니 돌아가셨다던가 병이 찾아왔다는.
그렇게 엄마의 고난은 끝이 보이나 했는데 서서히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혈압으로 시작했지만 그로 인해 신장기능이 망가지면서 이식수술이 불가피해졌다.
다행히 남동생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엄마가 수술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의 신장을 받고 싶어 하겠는가 그 마음은 충분히 알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수술은 하는 게 맞았다.
어르고 달래서 수술을 받게 되고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회복도 빨라서 퇴원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의료사고였다. 엄마가 다시 살아온다면 부검도 하고 얼마나 길던간에 재판도 하겠지만 엄마는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참담함을 안고 장례식을 치렀다.
엄마는 나에게 엄마가 힘들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나도 엄마에게 속상한 얘기를 내비치질 않았다. 아픈 맘은 감추고 기쁜 맘만 표현하는 게 사랑이라고 엄마와 나는 그렇게 믿었던 것일까.
나와 내 딸은 기쁨, 슬픔은 물론 소소한 것까지 공유한다. 그래서 서로 간의 비밀이 없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다정한 모녀사이로 세월을 공유한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엄마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배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넘어질지언정 씩씩하게 일어서서 다시 삶을 헤쳐나가는 강한 정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