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로우 Jul 29. 2020

삶은 내가 존재함을 느끼기위한 여정이다.

나만의 삶을 가꾸며 중심 잡기

누구든 마음속에 부러운 이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때로 부러움이라는 단어로 다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동경은 호기심, 질투, 박탈감, 열등감, 사랑, 관심 등 복합적인 감정과 함께 찾아온다.


내가 동경하는 그 사람의 인생은 나와는 너무나 달라서 빛나고 아름답고 내 손에 쥐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조금 더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자세히 그려보고 싶지만 도저히 그들이 어떻게 매시간 매초를 보내는지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환상 속의 그들은 행복하며, 성취하며, 즐겁고, 아름답다.


영국 왕실을 주제로 다룬 드라마 '크라운'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스 왕족으로 태어나 탄생에서부터 존재의 특수성을 인정받은데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군이 되어 나라의 대소사를 돌보는 에든버러 공작이 달에 첫 발을 내디딘 우주비행사를 동경하는 에피소드.


'달에 다녀온다.' 그것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꿈으로만 경험하고 말로만 담을 수 있는 것이다. 필립공의 동경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가 초조함 끝에 만난 우주영웅들의 이야기에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누군가에겐 우주영웅의 대서사시였던 달에 가던 그날도, 그들 자신은 어느새 펼쳐진 여느 순간 속에서 우주계 일꾼으로서 프로토컬에 따라 평범한 자신을 이어나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런 그들에게 더 신기한 것은 왕족으로 태어나 버킹엄 궁전에 사는 필립 공이었다.


이렇듯, 타인의 삶은 도대체 해독할 수 없는 암호와 같은 미스터리가 되기도 하고, 그 모든 간절함과 노력으로 가꿔온 내 인생을 갑자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에든버러 공장에게도, 우주영웅에게도, 나에게도,

'시간적, 존재적 특별함 같은 것은 없는 나'는 공평하게 주어진다.






사람들은 태어나져 태어나고 죽게되어 죽는다. 그래서 삶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무자비하게 주어지며, 또한 유한하다.


탄생과 죽음까지 주어지는 을 사람들은 흘려보내기도 하고 움켜쥐기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행동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


“Death is always on the way, but the fact that you don't know when it will arrive seems to take away from the finiteness of life. But because we don't know, we get to think of life as an inexhaustible well. Yet everything happens a certain number of times, and a very small number, really. How many more times will you remember a certain afternoon of your childhood, some afternoon that's so deeply a part of your being that you can't even conceive of your life without it? Perhaps four or five times more. Perhaps not even that. How many more times will you watch the full moon rise? Perhaps twenty. And yet it all seems limitless.”

"죽음은 언제나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죽음이 언제 도달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삶의 유한함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단 몇 번만, 사실은 아주 적은 횟수만 일어난다. 당신은 어린 시절 그 오후들을, 그것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당신의 존재에 깊은 영향을 준 그 오후들을, 몇 번이나 더 떠올릴 것인가? 아마도 네 번 혹은 다섯 번 더. 아마 그만큼도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을 몇 번이나 더 볼 것인가? 아마도 스무 번 정도.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무한해 보이는 것이다."

- The Sheltering Sky by Paul Bowles / 폴 보울즈의 마지막 사랑


이렇게 한정된 삶이라는 시간에서 사람들은 치열하게 무엇인가 획득하고 이루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법과 지식은 내 생명의 존엄함을 인정하고, 대중문화는 끝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들을 비추며 내 인생이 가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입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시적으로 뛰어난 것들을 가지고 있다. 아주 많은 돈, 아주 뛰어난 외모, 아주 출중한 실력, 그리고 특권이 주어지는 직업.


때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만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좋겠다고.

특별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직업이 그 사람의 쓸모를 어느 정도는 설명해줄 테니.

그게 없다면 무엇으로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지 더 힘들게 떠올려야 하니까.




내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간절히 원하던 것이 있었고 그것을 얻고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했을 때였다. 욕망하고 성취하는 과정에서 대체 내가 왜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 그것이 없는 나의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 수많은 노력도 치열한 생각들도, 사실은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 가치감을 느끼며 내 존재의 이유를 나 자신에게 되뇌이고자 한 본능과 같은 몸부림이었다.


짐승도, 곤충도, 식물도 나와 다르지 않게 삶을 시작하고 주어진 시간이 끝날 때까지 본능에 맞춰 살아간다.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생이라면 과연 인생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 나도 모르게 태어나 학교를 가고, 직업을 가지고, 결혼하여 애를 가지고... 그리고 죽는다. 시간은 손 위의 모래알처럼 흘러 지나가 버린다. 그렇다면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느 철학자는 사람이 태어나는 이유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또 다른 철학자는 아무리 찾아도 삶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라 한다.


선한 영향력, 좋은 직업, 돈, 자유, 친밀감과 애틋함, 범죄까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를 목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있음을 감정과 감각으로 느끼는 것.

그래서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졌을 뿐인 내 삶의 가치를 스스로라도 느끼고 증명하고자 하는 것.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별다를 것 없지만 삶을 부여받은 우리는
자신이 조금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에 기뻐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존재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증명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태어나져 태어나고 죽게되어 죽는 모든 생은 본디 더 중요하지도 하찮지도 않다. 무엇을 이루고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더 올라가지 않는다. 아니, 어떠한 이유에서든 더 가치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삶의 의미를 찾아 기뻐하는 우리는 삶의 의미가 없어 공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탄생부터 부여받은 삶의 목표와 가치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란 사실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공허하다.

인생의 무의미함과 가치부여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그 수많은 것들이 희로애락이 된다.

동경도 사랑도 실패도 좌절도
삶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열심히 살면서 업적을 쌓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은 남과 똑같이 부여받은 인생을 더 가치 있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가치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며 노력하지 않아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성공을 해도 자기 가치를 확신할 수 없다면 허무하기도 하다.


삶의 가치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섭섭함도 대체 왜 생기는지 모른다. 무쓸모함은 그러나 확실히 슬프다. 왜인지 모르게 내장된 동물로서의 본능이, 자꾸 성공과 관계에서 나를 슬프게 한다. 사회에서 다른 구성원의 도움을 받아 생존하기 위해서 내가 무언가에서 쓸모가 있었어야 했다고 진화학자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삶의 의미를 찾는 이유는 더 기쁘고 슬프지 않기 때문, 오직 그뿐이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내가 제일 좋았던 답은 이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이 내게 주어졌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면 내 삶이 의미 있어지는지는 찾을 수 있다.





타인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일 수 있다.


물질적, 사회적 성공이 나에게는 대단한 의미일 수 있으나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오롯이 나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확인해주는 방법이 된다.


인간과 사회는 유기적이다. 내가 타인을 만나고,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사회 간 교류를 하고,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오늘 누구와 만나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가 나의 오늘과 미래에 영향을 준다. 오늘의 나는 인격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영감을 준 어떤 이 덕분에 기분이 좋을 수 있다. 그 감명이 내 인생에 작고 큰 영향을 주고, 그것은 또 나에게서 남으로 퍼져나가 사회와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돈과 명예, 권력에 대한 욕구는 한편 나의 영향력을 제일 쉽게 보여주는 도구가 된다.


유기적인 사회라는 것, 사회에 대한 공헌이라는 것을 목표하게 되는 것은 타인의 기쁨과, 타인이 인정하는 나의 기여로 인해 얻는 가치 증명과 같다. 타인에게 나의 존재를 증명받고자 하는 것이 반대로 현상화된다면 범죄도 그러한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몰입은 나의 존재함을 느끼게 해준다.


몰입은 순수하고 기쁜 시간으로 나의 생을 채워준다. 삶의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가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 것이라면, 후회가 남지 않는 행복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몰입이야말로 내게는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이다.



종교의 존재이유도 이와 비슷할 수 있다.


종교는 신이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했으며 인생은 그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 설득할 수 있다. 사회과학자로서 종교가 사회에 통치의 수단으로 쓰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신앙이라는 것이 그 외로도 기능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의 타고난 공허함을 메꿔주는 역할이 아닐까.





결국 모든 깨달음은 진부한 말로 끝난다. 삶을 의미 있는 행위로 채우고, 공허함은 피할 수 없는 동반자이며, 가시적인 것을 생각 없이 좇지 말 것이라는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때로 공허함의 이유가 무엇일지,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좋은 행위를 해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고, 꿈을 이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 끝에 나는 사회와 내 무의식이 심어놓은 욕구에 따라 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내가 원하는 바에 맞는 삶에 가까워지도록 크고 작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더 나다운 삶, 더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