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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과 안정 Feb 20. 2019

자기 앞의 생 2019ver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은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와 그러한 아주머니의 죽음으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맡게 되는 아이 모모, 같은 공간에서의 만남은 인간의 삶의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렵고 조심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는 2019년인 것 같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삶

  대학교 초반에 명절에 고향에 가면 할머니부터 손주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아주 어렸을 때 친척형 동생들과 방에서 놀고 어른들은 밖에서 따로 놀때보다도 더 화목하고, 고부갈등 명절갈등은 그저 머나먼 이웃의 이야기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분은 이러한 화목한 가정에 질투라도 하듯 어르신들의 몸이 조금씩 좋아지지 않으면서 균열이 서서히 생기고 있다. 더욱 잔인한 것은 너무 서서히 균열이 생겨서 밖에서 보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올해 명절도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웠지만, 10여년 전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언제까지 이렇게 화목하게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그렇다. 모임을 하면서 혹은 술을 마시면서  “삶을 언젠가 끝나게 되어있어” “누구나 한 번 살다가 가는 거야”라고 말할 때는, 설령 그것이 내 인생이라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처럼 말한다. 하지만, 막상 이것이 정말로 내 눈앞에 다가 오고 내 앞에 놓여진 생이 된다면 너무나 두렵고 슬퍼진다. 


이렇게 현실이라는 것은 그 어떤 칼보다 날카롭게 찌르는 것 같고 팩트폭행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잔혹함을 지닐 때가 있다. 


이 잔혹함은 “너는 내가 나중에 아프게 되면 굳이 살리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말과 함께 나에게 비수를 꽂는다.  대학생 때 집에 내려가면 그저 며칠 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오곤 했는데, 요즘은  “이 분들은 내 나이 때 어떠한 꿈이 있었을까?” “내 나이 때 나를 가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를 고민해보게 된다. <자기 앞의 생>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은 끝과 마무리인 것 같다.


인생의 또다른 국면, 행복일까 비극일까

 하지만, “나의 집”으로 돌아오면 내 자신의 인생의 또 다른 막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어진다. 2019년은 나에게 있어 대체복무와 대학원 인생이 동시에 끝나는 너무나 중요한 시점이다. 이제 그 동안 미뤄왔던 고민들에 대한 결정을 해야되는 시점이다. 지금까지는 치밀한 계산과 전략으로 내 앞에 놓여진 수 많은 다리들을 끊지 않고 계속 안고 왔다면, 이제는 일부 아니 대부분의 다리를 불살라야 되는 결정을 해야 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해를 위해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때는 2012년, 학부 졸업과 대학원 입학의 어느 중간에서 “내가 할 줄 아는 건 연구 밖에 없다.”, “군대 문제가 걸려있지 않다면 대학원을 가는 선택을 과연 할 것인가” 라는 모순된 2가지 생각을 가지고 ‘그저 정답을 찾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정답이 없는’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으면 ‘삶을 포기하는 게 더 편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어쨌든 뭐라도 결정을 했어야 했었고, 책상 위에서 펜이랑 짱돌 굴린다고 답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남들이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죽기 살기로 연구를 하고 주말에나 저녁 시간대에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른 길에 대한 정보 채널을 열어두자" 라는 결정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래서 내가 참석하고자 하는 모임 외에는 거의 일절 관계를 맺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시간이 흘러흘러 2015년이 되자, 나에 대해 한 문장의 추가 정보를 얻게 된다. "연구과정을 정말로 좋아하지만, 연구가 목표인 삶은 질색이다. 연구 과정을 실제 살아가는 삶에 적용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 2~3년의 짧지만 치열한 삶 속에서 고작 나에 대해서 한 문장 밖에 추가하지 못했지만,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쉽게 바뀌지 않을 자아를 캐낸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연구 과정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창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스타트업 강연도 연구가 끝난 저녁에 2달 동안 듣고 실제로 일을 할 수 있을 만야에 있는 분한테 컨택하고 논의했다. 사실, 2016년에 교수님이 안식년에 가 있을 동안 일을 병행해보고 싶은 계획도 있었고 교수님한테도 "교수님이 가 있는 동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제 길을 찾고싶다."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녀석은 내가 연구를 더 하기를 원했던 것일까. 원래 하던 연구에서 조금 다른 분야에서 우연치 않게 논문을 쓸 수 있는 아주 괜찮은 녀석을 얻었다. 결과만 얻은 것이 아니라, 여기서 잘만 발전시키면 졸업 이후에 자연스럽게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전환할 수 있고 인공지능 관련된 일도 할 수 있는 분야의 결과였다. 그래서 2016년에 나는 창업과 연구 중에 선택하는 선택지를 또 다시 미루는 비겁하고 소인배 같은 선택을 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앞으로 진로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답한다. 왜냐면 진짜 모르고, 솔직히 말하면 진로에 대해 아직 생각조차 못해봤다. 지금 연구결과를 통해 다양한 길을 열어둘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 올인을 해버렸다. 끝은 못 맺고 판돈을 자꾸만 커져가고 있다. 이러다가 수 틀리면 정말 큰 좌절을 경험할 것 같다. 어쨌든 2016년에 얻은 “괜찮은 녀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내 진로를 크게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이상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현실을 찾거나, 현실에 맞는 이상을 고르는 결정을 많이 하는데, 내 생각은 “현실과 이상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같이 보면서 바꿔가야 된다”이다. 아무것도 알 수는 없지만, 지난주에 연구 결과의 8부 능선을 넘기면서 “괜찮은 녀석”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진로를 어떻게 설정할 지도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2019년 12월에 나는 모임에 남아 있을까?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까? 일반회사에 들어갈까? 창업 전선에 뛰어들까? 아니면 모두와 단절하고 어디론가 사라질까? 그것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내가 어떻게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겪게 될 이 과정은 사실 너무 괴롭고 고통스럽다. 그래도 2012년에 비슷한 경험을 통해 삶의 지평을 넓히고 많은 걸 배울 수 있음을 배웠기 때문에, 나는 고통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특히 인생을 시작보다는 마무리가 가까운 부모님과의 논의 혹은 갈등 속에서 인생의 더 많은 면을 배우리라 기대한다. 각자가 가진 자기 앞의 생의 다채로운 맛을 맛보고 색깔을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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