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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뫼 Oct 08. 2016

내가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들

 '수필의 아름다움'이라는 교양 과목의 수필 한 편 쓰기 과제

자격증을 찾기 위해 옛날 책꾸러미를 뒤지다가 98년 가을 학기 교양 과목인 '수필의 아름다움' 시간에  제출했던 글 한 편을 찾았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

소풍 전날 보물 찾기의 즐거움을 상상하며 새벽까지 잠 못 이루던 초등학교 시절의 순수한 가슴 설레임이 그렇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친구를 대하면 안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내가 목적한 바도 아닌데 세월을 벗삼으며 차츰 사라지는 것들

나는 그것들을 사랑한다.


이러한 것들이 비단 어릴적 추억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들의 지성과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커닝이 만성화 되어 버린 강의실에서 우리  모두는 웃고 즐기며 부정직을 태연하게 만끽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고 옳고 그름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작용되느냐만 중요하다.

옳지 못함에 나무라는 선배도 없고, 가끔 강직한 선배가 도덕 교과서의 쓴 소리를 들고 나와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선배의 말을 듣고 행동을 바꾸는 후배도 정작 부끄러움은 없다. 얼굴 붉히며 나무라는 선배의 눈을 피하자는 것일 뿐.

부도덕한 일탈이 일상화 되어버린 廉恥不在의 세상이다.


그래도 내가 후배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간간히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1998년 1학기 중간고사 때로 기억한다.

일찌감치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그날 볼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후배 한 명이 황급히 나를 찾아왔다. 시험 범위의 중요 부분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그 후배 말인 즉, 어젯밤 너무 피곤해서 새벽에 일어나 공부할 요량으로 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고 잤는데 일어나니 아침이었다는 것이다. 서러운지 말하는 동안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후배가 떠난 후 하던 공부를 마무리하고 시험을 치르는 강의실로 갔다. 그 후배가 교탁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뒷쪽에 빈자리가 서너 군데 있는데도 말이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한 삼십 분 쯤 흘렀을까

그 후배가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갔다. 밖에서 만난 후배에게 시험을 잘 치뤘냐고 물었다. 후배는 뾰루퉁하여 대답했다.

"선배님은 제가 일찍 나가는 걸 보셨으면서 그렇게 물어보세요?"

후배의 그러한 말투는 버릇없게 여겨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웠다. 유혹에 굴하지 않은 모습이 도도해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것들을 아름답게 생각한다.

손자 재롱에 웃음짓는 할머니의 얼굴, 오월의 장미, 애절한 거문고 가락, 살풀이 춤을 추는 여인네의 보일 듯 말 듯한 버선코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름다운 것들은 너무 많다. 헤아리기 숨이 벅찰 정도다. 예전엔 지극히 평범했던 것들이 지금은 희소성때문에 아름다워 보인다.

촌지를 받지 않은 선생님이, 편지를 잘 쓰는 대학생이, 김치를 잘 먹는 아이가, 메이커 의류나 신발에 무덤덤한 중고등학생이, 낮선 이방인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시골 아줌마의 따뜻한 정이, 시방서 대로 시공한 건설회사가, 거짓말 하지 않는 정치인이, 커닝을 하지 않는 학생이, 한 학기 동안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는 대학생이 아름다워 보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20세기 말, 대한민국 사람들은  평범한 것들을 동경한다.

나도 이러한 것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사랑하며 동경하고 싶다. 눈 내리는 겨울날 밤새 스윙 연습을 하는 야구벌레처럼 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사월 중순이 되면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기가 실려 오겠지

이슬 머금은 새벽 공기의 신선함은 내일도 계속 되겠지

사 년 후에는 부정직한 정치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일은 없겠지

십 년 후에도 이같은 고민을 하지는 않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내가 동경하고 우리가 동경하기에 아마 그럴 것이다.

이러한 평범한 바람이 나의 동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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