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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희수 Oct 11. 2019

탈현실 하고 싶을 때 읽으세요.

테드 창의 ‘숨’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주관은 참 무섭다. 처한 현실과 감정에 휩싸이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자기 세상 안으로 빠져든다.


난 이걸 직장인이 되고 나서 더 체감했다.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 지하철, 매일 보는 사무실 풍경과 사람들, 의미 없는 일들. 그 안에서 비슷한 생각과 감정들을 반복했다. 내 세계가 지하철과 사무실로 단축되는 기분에 자주 도망가고 싶단 생각을 하곤 했다.


좀 더 어렸을 땐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루피처럼 살 줄 알았다.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내 동료'를 모으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줄 알았다. 정작 어른이 된 나는 좁은 서울조차 떠나기 어려웠다.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고, 비용을 먼저 생각했다.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때 내가 찾은 소심한 대안은 인식의 세계를 잠시 바꿔보는 것이었다.   

자유를 찾아 칙칙폭폭


테드 창은 낯선 작가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90년대부터 낸 작품이 중단편으로 17편뿐이다. 한국에는 2002년 <당신 인생의 이야기>, 2019 <숨>으로 작품집 2권이 출판됐다.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 전공자로, 소설은 이 사람의 사이드 프로젝트쯤 되겠다. 대중적으론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 컨택트의 원작인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알려졌다.

'테드 창' 구글링 하면 더 많이 나오는 이 분


테드 창의 소설은 보통의 SF소설과는 다르다. 테드 창의 소설은 현실에 기반한 과학지식과 그만의 논리적인 예측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서사적으로는 조금 아쉬울 수 있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고 캐릭터도 잘 드러나지 않고, 심할 때는 설명으로 끝나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나올 때마다 반향을 일으킨다. 전문지식이 담긴 디테일한 이야기들은 정말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거 같은 현실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테드 창은 소설을 구상할 때 관련한 전문 지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야 스토리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예로 외계 문명과 언어를 가지고 소통하는 과정을 다룬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학자가 보기에 학문적인 근거가 타당하다고 한다. 언어학 전공이 아님에도 언어체계를 이해하고 하나의 언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테드 창은 정말 천재다.

이 사람이 테드 창이다


그의 단편들은 모두 주옥같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단편 <숨>이다.


지적 능력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사는 세상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의 세계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다. 분명 기계적 결함이 없는데도 시계가 빨리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에 의문을 품고 있던 해부학자인 주인공은 한 가지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그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위험한 실험을 시작한다.


주인공은 자신들을 움직이는 동력의 근원을 찾는 실험을 시작한다. 그는 스스로를 해부하기로 결심한다.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통감이 없다지만 죽을 수도 있다. 거울과 손에 연결된 기계를 통해 뒤통수에서 뇌를 꺼내 하나씩 해부한다.


주인공은 이 실험을 통해 자신들을 움직이는 동력의 근원을 발견하는데, 바로 기압이다. 몸을 구성한 기계 톱니와 부품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공기의 순환이었다. 전 우주적으로 기압의 고저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들의 두뇌활동이 느려져 시계가 빨리 가는 것처럼 느낀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고, 머지않아 모든 기계가 정지한 그날을 맞게 될 것이다. <숨>은 종말 이후에 자신들의 세계를 발견할 모험가를 향한 주인공의 편지글이다.

작품과 상관없지만, 읽는 내내 떠올랐던 퓨처라마의 벤더


잠시 상상해보게 된다.


안드로이드의 생애와 그 세계의 멸망을 보며, 완전 다른 세상의 공상으로 여겨지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기계이고 우리와는 다른 생체를 가지고 완전 다른 경험을 한다. 그럼에도 존재의 근원을 궁금해하고 찾아가는 모습은 우리와 닮아있다. 우리 역시 어떤 생명의 근원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빅뱅이든 무엇이든 현재 많은 과학자들이 그걸 찾고 있다. 세상의 근간을 찾아낸 그 끝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리고 그 발견은 우리의 종말을 알리는 예고가 될까?


우리는 종종 망각한다. 내 신체로 인지할 수 있는 경험만이 전부이고, 이 시간만이 영원할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랬고 그 안에 갇혀 내 현재와 미래를 비관했다. 하지만 <숨>을 읽으며, 이 책 속 상황은 픽션에 불과하지만 잠시 내 현실세계를 떠나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상하는 힘은 내 현실을 더 확장하는 시야를 갖게 해 줬다. 우리의 세상이 지금 멸망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존재 근원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내가 인지하는 세상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갖게 해 줬다.


테드 창의 소설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보통의 SF 물은 회의적인 시선으로 미래 세계를 전망하고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그러나 테드 창의 소설은 인류애를 가지고 세상을 그려낸다. <숨>의 마지막 문단을 남김으로 오늘의 글을 마치고자 한다. 테드 창의 <숨>을 읽으며 내 세상에선 보이지 않지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세계를 경험하고 모험해보길 바란다.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났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탐험 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드 창 <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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