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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희수 Nov 30. 2019

남은 연차 0개를 위해 읽어보세요.

김연수 단편 ‘내겐 휴가가 필요해’를 읽었습니다.

차가워진 공기에 한 해가 끝나감이 체감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 새삼 2019년이 아쉬워지죠.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 한 해를 시작하며 다짐했던 새해 계획들. 남은 한 달이라도 잘해보자고 마음을 먹어봅니다. 우리가 올 한 해가 끝나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게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바로 노동자라면 연간 15일 주어지는 연차입니다.


첫 직장은 6-8월이 극성수기였습니다. 남들은 더위를 피해 서울을 벗어날 때, 사무실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그날이 폭염인지 아닌지도 모르며 여름을 보냈습니다. 회사에 들어간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라 업무는 헤매는 중이었고, 광고주 회사의 대 이벤트가 있던 차라 위에 눈치가 한창 보이던 시기였습니다. 성과는 기본 이상으로 내야 하는데 전 마구 헤매고 있었죠.


상황이 상황인지라. 함께 일한 지 얼마 안 된 상사는 제일 투철하게 야근을 불태웠고, 디자인 팀과 개발 팀은 일정과 수정사항에 치여 철야에 철야를 이어갔습니다. 휴가의 ㅎ자도 생각 못할 만큼 숨 돌릴 새 없이 여름은 지나가버렸습니다.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해가 지나버렸습니다. 연차는 15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도요...


간혹 몇몇 회사들은 남은 연차들을 돈으로 지급한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다니던 회사에선 사용하지 않은 연차는 공중분해됐습니다. 아까운 내 휴가를 그렇게 사라지게 할 순 없었습니다. 상사의 휴가를 피하면서도 다른 팀원들과 겹치지 않으면서, 바쁜 일정을 교묘하게 피해 내 공백이 티 나지 않는 황금 타이밍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치열했던 눈치게임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제 연차는 장렬하게 사라졌습니다.

라이언... 아니 연차를 구해야 합니다.


김연수 단편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저와 같이 휴가 때문에 눈칫밥을 먹고 있는 '강'과 긴 휴가를 보내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지방 소도시의 도서관 말단 사서인 '강'은 온갖 잡무에 시달립니다. 거기에 상사들 눈치에 치여 이번 여름휴가조차 마음 편히 내기가 어렵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전설 같은 존재가 하나 있는데, 10년 동안 도서관에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들며 청구기호 300에서 900번대의 책들을 읽어나가는 남자입니다. 양심선언을 하고 물러난 학자라는 설, 정치에서 밀려난 유명대학 교수라는 설. 소문은 무성하지만 이 남자의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강이 늦은 저녁까지 도서관에 남아 서가를 정리할 때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 둘은 함께 술자리를 이어가게 됩니다. 남자의 정체는 학자도 대학교수도 아닌 형사였습니다. 남자는 어느 날 가족들에게 말도 없이 퇴직서만 던지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가 심문했던 '정신 못 차리고 시위나 하는' 대학생이 탁 치니 억하고 죽어버린 것이죠. 그 대학생의 죽음에도 단지 업무상 과실로 처벌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겐 어떤 일말의 죄책감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하지만 그 대학생이 죽어가던 때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눈빛을 떨쳐내기 위해 남자는 잠적하게 됩니다. 세상에 다시 떳떳하게 나가기 위해 책을 하나 쓰기 위해 도서관에 들어왔습니다. 피땀으로 일군 이 나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책, 그 대학생의 신념, 꿈이 헛된 것이란 걸 깨닫게 해 줄 그런 책. 그래서 남자에겐 잘못이 없다는 걸 세상이 알게 할 그런 책 말입니다.


하지만 남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책을 쓰기 위해 역사서를, 철학책을, 온갖 책들을 읽어나가다 보니 어느 책에도 한 사람의 생명은, 그의 사라진 꿈을 대신할 수 있는 문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대학생의 눈빛을 이겨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10년의 시간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는 영원히 그 대학생의 눈빛을 떨쳐낼 수 없단 것을요.


책들 속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생의 행로를 겪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인생의 굴곡을 거칠 때마다 그들의 내부에서는 거품처럼 여러 감정이 일어났고, 그 감정들로 인해 삶은 다시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죽지 않은 까닭은 단순한 문장들 때문이었다. 그가 책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든가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등의, 그게 역사서든, 과학서든, 철학서든. 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뒤 그가 알게 된 진리는 그처럼 단순했다. 그동안에는 정신없이 살아가느라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 대학생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빛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옳았다. 책을 읽는 게 아니었다.

김연수 '내겐 휴가가 필요해' 中



"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뒤 그가 알게 된 진리는 그처럼 단순했다. 그동안에는 정신없이 살아가느라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휴가를 쓰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 때문에 일을 독박 쓸까 봐 눈치 준 상사, 동료도 없었고, 내가 없으면 일이 진행 안된다고 잡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실 회사는, 업무는 내가 없어도 여전히 잘 돌아갑니다. 지금 하는 일이 휴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 외에는요.


회사에 있는 동안은 너무나 쉬고 싶었지만, 막상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누군가는 해외여행을 간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집에 틀어박힐 거라도 하더군요. 어딘가에서 돈을 많이 쓰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어 오면 쉬는 걸까. 하루 종일 누워서 티브이만 보면 쉬는 걸까. 제 스스로 쉬는 게 뭔지 모르면서 계속 불안해 하기 만했습니다. 점점 쉬는 것조차 어려웠고 일이 바빠질 땐 지금 처리해야 하는 업무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정신없이 살아가느라 정작 내게 필요한 걸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여행은 좋은 것 입니다.


‘쉼은 중요하다’, ‘이렇게 쉬는 게 좋은 방법이다’ 모두 다 아는 말이죠. 하지만 막상 내 일상에 대입했을 땐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설에선 쉼은 우리에게 필요한 ‘멈춤’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남자는 정신없이 돌아가던 삶을 멈춤 합니다. 그리고 멈춤은 그가 알지 못했던 곳으로 그의 인생을 데려가죠.


회사에서 정해준 프로젝트, 성과, 승진, 연봉 상승. 앞에 놓인 목표들이 보이고 이대로 달리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결승선이 정말 맞는 길인지 내가 원하는 결과인지는 알지 못하면서요. 그때의 저는 마냥 바쁜기만 한 일상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허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멈춘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면서요. 그게 정말 내게 필요한 일이란 걸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바쁜 연말입니다. 행사도 많고 어느 부서에선 정산 때문에 특히 더 바쁠 수도 있겠네요. 아직 사용하지 못한 연차가 남으셨나요? 올 한 해 ‘멈춤’할 수 있는 마지막 한 달이 남았습니다. 남은 연차 0을 향해 도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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