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한국간이식인협회 수기공모 금상작
『간 이식 후 6년, 흉터 성형 수술을 받으니 잊고 살던 수술 기간이 선명해집니다.
다시 한 번 오늘의 평범한 삶에 감사하며 기증자의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수여자의 수기는 많으나, 기증자의 수기는 많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간 이식을 망설이고 있거나 수술을 앞두고 있는 예비 기증자들에게 힘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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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작은 용기는 여러분과 가족의 삶에 위대한 변화를 불러 올 것입니다.
큰 흉터마저 소중해지는 ‘수술 후 삶’에 확신을 가지시고 용기내시길 바랍니다.”』
Part 1. 수술 전 이야기
장기수용자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쉽게 이식을 부탁 하지 못합니다.
기증자들이 용기를 내어, 먼저 확고한 의사를 밝히지 못한다면 이식은 미루어질 뿐입니다.
제가 먼저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절대로 먼저 부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엄마의 병은 비밀]
시끌벅적한 교실의 오후, 책상 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나에게 친구들이 하나 둘 몰려들었다.
“은지야, 왜 울어? 무슨 일이야?”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해 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젯밤 내가 들은 말이 자꾸 거짓말 같아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 할 수가 있었다.
“우리엄마…… 암…… 암이래.……”
‘암’ 내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낯설고 무서운 단어였다. TV에서만 보던, 드라마의 주인공만 걸리던 그 병에 우리엄마가 걸렸다는 것이다.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나에게 엄마의 병은 너무나 큰 짐이었다. 간염 보균자인 언니는 영국 어학연수 중이었고,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쉬쉬하며 둘이서 중국이식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우연히 엄마와 이모의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되었고, 나는 혼자 가슴앓이를 시작했다. 큰 이모는 엄마에게 이식을 해주겠다고 검사를 받은 상태였지만, 지방간 때문에 이식 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날부터 독서실 인터넷강의실에서 컴퓨터를 차지하고 앉아 간이식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내가 해야겠다, 내가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마치 이식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에게 주어진 임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부모님과 나는 서로가 엄마의 병에 대해 더 알려고도 알려주려고 하지 않은 채 나의 수능시험이 끝나고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엄마 내가 할게. 내가 할 수 있어.”]
수능이 끝난 직후 친척동생과 만나 영화를 볼 기회가 생겨, 엄마의 병에 대하여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가족 들 중 친척동생에게 처음으로 간 이식수술에 대한 나의 확고한 의사를 전했다.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몇 개월 동안 해왔고, 이모들이 가능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난 엄마의 딸이었고, 그게 나의 의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척동생과의 대화는 이모에게로 전해졌고, 이모는 엄마를 설득했다. 딸만은 절대 안 된다며 나를 후보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척동생과의 만남은 너무나 감사한 운명이라고 생각된다.)
며칠 후, 아빠가 언니와 나를 불러 집 앞에 있는 치킨 집에 데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아빠 눈가의 주름이 더욱 깊어 보이는 밤이었다. 아빠가 처음으로 언니와 나에게 엄마의 상태에 대하여 솔직하게 털어놓은 날이었다. 의사에게 간이식을 권유 받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고, 중국이식을 알아보고 있지만 그에 대한 후유증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빠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나는 아빠가 어서 그 말을 꺼내어 주길 바랐다. 나는 마음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지만, 딸에게 그런 부탁을 해야 하는 아빠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한참 뒤 아빠는 눈물을 참으며 수백 번 수천 번 망설인 그 말을 나에게 힘겹게 뱉어냈다.
“은지야… 네가… 해줄 수 있겠니…?”
날 만들어준 부모님이, 살려달라고 말하는걸. 이렇게 힘들어 하신다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일부러 더욱 발랄하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빠! 이걸 왜 미안해하면서 말해? 나는 내가 하려고 계속 생각해왔고 알아봤어.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 살릴 거야.”
간염 보균자여서 이식이 불가한 언니도 나에게 미안해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세 부녀는 치킨 집구석에서 손을 붙잡고 한 참을 울었다.
집에 돌아와 방에 불을 끄고 누워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말했다.
“엄마! 내가 하기로 했어. 알았지? 걱정하지 마.”
엄마는 미안하다며 내 손을 잡고 한 없이 울었다.
Part 2. 수술 이야기
기증자의경우는대개입원기간이매우짧고그고통은작습니다. 퇴원 후 일주일 정도만 집에서 휴식을 취하면 일상생활이 가능해집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시경은 힘들어]
기증자가 확정되니 생각보다 수술이 빨리 진행되었다. 엄마의 상태가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었다. 일주일간 입원하여 진행 된 검사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심리검사, 피검사, CT검사, MRI등 하루 종일 바빴다. 다만, 마취 없이 진행 된 내시경은 너무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미안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았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검사 과정에 문제가 있어 내시경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간호사선생님의 말에 아빠는 의사선생님에게 찾아가 고개 숙여 부탁을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추가 검사가 불필요하다는 대답을 들었고 나는 다시 수다쟁이로 돌변했다.
[이제 수술실로 갑니다]
2007년 1월 중순, 수술 전날 입원을 했다. 외가 친가 모든 친척들이 비좁은 나의 병실에 모여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교회식구들도 방문하여 함께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함께해 주었다. 밤에는 엄마의 병실에 놀러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간을 주고받을 사람들 치고는 너무나 소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두려운 마음을 감추었다.
수술은 이른 아침이었다. 나를 실어갈 이동침대가 도착했고 나는 사뿐히 그 위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 움직이는 천장만 바라보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침대를 옮기는 아저씨의 능숙한 솜씨에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동 중에는 아빠를 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아빠가 오른손을 잡았다. 그 옆에서 고모는 눈물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었고, 목사님은 날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
‘아 이제… 정말 하는 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현실인데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계속 천장을 보았다. 그리곤 다짐했다.
‘절대… 절대로 울지 말아야지… 아빠 앞에선 절대로 울지 말자…’
수술실 앞에 도착하여, 이제 인사를 나누라 했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만 잡고 있었다. 고모는 드디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고, 나는 겨우겨우 눈물을 참아내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수술을 기다리는 여러 사람들의 이동침대 옆에 내 침대가 줄을 섰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 머리에 수술 모자를 씌어주고, 문 앞에 아빠와 계속 인사를 나누었다. 계속 웃으며 손을 휘젓는 나를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로 쳐다보았다. 눈물을 참아주는 아빠가 너무 고마웠다. 잠시 뒤,
“이동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들렸고, 아빠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이제 정말 나 혼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끝까지 웃는 얼굴로 아빠를 안심시켰다.
[너무나 멀었던 수술실, 너무나 짧았던 수술시간]
수술 실은 생각보다 멀었다. 복도를 지나고 또 지났다. 하긴, 아까 그렇게 수술을 기다리던 줄 서있는 침대들을 생각하면 수술실이 많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얼굴을 보고 있을 때 보다 더 마음이 단단해졌다. 잘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스스로 주었던 것 같다.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울지 말자 강해지자 주문을 걸었다. 마침내 내 수술실에 도착했고, 나는 수술대위에 눕혀졌다. 잠시 뒤에 간호사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취를 시작한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 후 나는 아주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눈을 떴을 때는, 중환자실이었다. 큰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인 정신이 드냐며 아빠를 불러준 것 같았다. 아빠를 보자마자 내가 처음 한 말은 “아빠, 언니 어디에 있어?”였다. (아빠는 아직도 내가 언니를 먼저 찾은 것을 굉장히 서운해 하신다) 이상하게 언니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언니 우리 이제 엄마랑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평소에는 그렇게 도도한 언니가 내 옆에 서서 엉엉 울며 고맙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나도 언니의 손을 잡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주변에 다른 친척 분들도 서있었지만, 아빠와 언니모습 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수없이 잠이 들고 잠이 깨고 하며 회복하고 있었다.
[10일간의 회복기]
마침내 병실로 옮기기 직전, 휠체어에 타고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나는 엄마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항상 누렇고 까맣던 엄마의 얼굴이 하얗고 탱탱하게 변해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이제 정말 살게 되었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엄마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계속해서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산소호흡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데도 “은지야 고마워, 열심히 살게.”라며 계속 나를 향해 소리쳤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나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 이후 이틀간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눈을 뜨면 친구가 와있었고, 어느 순간 또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뜨면 몇 시간이 지나고 친척 언니가 보였다. 언니가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또 잠이 들었다. 목과 가슴에 붙어있던 것들이 줄어들수록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도 길어졌던 것 같다. 간병인 아줌마가 생겼고, 운동을 시작하고 화장실도 다녔다. 배가 아프거나 하는 통증은 없었다. 다만 앉아있고 서있는 것이 힘이 없어서 불가능했을 뿐이다. 아빠는 매일 공을 부르라고 시켰다. 공을 부는 것은 마취 때문에 줄어든 폐활량을 조절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공불기’였다. 아빠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공불기를 할 것을 강요했다.
“나중에 숨차서 못 뛰게 되어도 괜찮아?”
라는 말을 수백 번 들은 것 같다. 그래도 아빠의 집요함 덕에 회복이 빨랐던 것 같다. 간병인 아줌마와 운동을 하며 조금씩 기력을 찾아갔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할 여유도 생겼고, 친척들이 방문하면 대화도 나누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정말 회복이 다 되었구나 싶었다. 의사선생님이 회진을 돌 때마다,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한 달은 입원할 줄 알았는데, 기증자는 생각보다 입원 기간도 짧고 회복도 빨랐다. 간 이식 수술을 한지 십 여일 만에 나는 집으로 향했다.
Part 3. 수술 후 이야기
수술후더욱깐깐하게가족들이신경을써야합니다. 식기 소독부터 공기 청정까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유난을 떨며 세균으로부터 엄마를 보호했습니다. 방심하지 마시고 유난스럽게 수술 후 회복을 버텨내셔야 합니다.
[수술 후 노력들]
엄마가 퇴원하기 전, 공기청정기를 준비하고 엄마가 사용할 식기들은 모두 따로 보관했다. 식사 때마다 뜨거운 물로 소독을 하고, 모든 음식을 익혀서 먹게 했다. 엄마는 먹고 싶은걸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아빠가 만들기도 했다. 엄마는 살았다고 안도하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더욱더 독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관리했다. 딸의 간을 이식했으니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노력하는 엄마가 고마웠다. 아빠도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으실 정도로 엄마의 위생을 신경 쓰셨다. 끊임없는 관리로 엄마는 이번 달에도 병원에서 ‘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오셨다. ‘정상’이란 단어가 얼마나 감사한 단어인가.
[흉터]
흉터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몇 년 사이에 넓이가 많이 넓어졌다. 1년 2년 지나니 색이 많이 옅어져서 보기에는 흉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바람으로 결국 수술 후 6년이 지난 2013년 새롭게 흉터 수술을 받았다. 간이식 흉터 성형 수술은 흉터를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흉터의 넓이를 좁아지게 하는 수술이었다. 수술이 생각보다 간단해서 이틀만에 수술을 받고 퇴원하였고, 지금은 열심히 흉터연고를 바르고 있어 흉터가 많이 좁아졌다. 여자로써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흉터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었다. 흉터 덕에 계속 내가 간이식 수술을 한 용감한 기증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고, 가족이 함께함에 감사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흉터는 어느새 내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가족에게 온 변화]
엄마와 나의 간이식 수술을 겪은 뒤 우리 가족은 정말 돈독해졌다. 힘든 시기를 거치고 나니, 서로의 소중함 그리고 애틋함이 커졌다. 가족들끼리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말은 함께 있다. 가부장적이던 아빠를 부엌에서 더 자주 보게 되었고, 나는 부모님께 더욱 애교 쟁이 딸이 되었으며, 언니는 더욱 책임감이 강한 맏딸이 되었다. 엄마는 나보다 더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며 열심히 일을 다니시고 계신다. ‘행복’이란 단어를 많이 쓰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나는, 우리 가족은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하다. 엄마가 간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더 행복할 수 있었지만, 수술 후에 오는 감사함과 행복함을 깨닫지는 못했을 것 같다. 너무나 평범한 하루에 감사하며 나는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우리 가족도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서로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