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풀 라이프>와 수북한 기억이 담긴 플레이리스트를 빌려
우린 때로 누군가의 기억에 귀를 기울이며, 지나온 적 없는 세계를 동경하거나 그리워합니다. 타인의 기억이 섞인, 마르지 않는 어제에 관한 노스탤지어. 저는 그것을 이야기라 부릅니다.
이야기를 나눠 읽고 나눠 들으며, 혼자인 밤을 견디는 사람들. 글과 함께, 어쩌면 우리가 이미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기억에 관한 음악들을 동봉합니다. 이 이야기가, 열렬히 사랑했고 슬피도 그리웠던 당신의 시절에 외롭지 않을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플레이리스트를 배경 삼아 글을 읽으시면 더 재미난 감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 영화 <원더풀 라이프>(ワンダフルライフ, 1998)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수북하게 쌓인 비디오 테이프, 궂은 화질의 텔레비전. 말쑥한 차림의 노인이 그 앞에 앉아 있습니다. 화면 속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무리가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 다닥다닥 모여 있습니다. 자욱하고 습한 시절의 열대야, 메리야스만 걸친 채 부채를 퍼덕이며 담배 연기만 내뿜는 무리 사이 흰 셔츠 소매를 걷은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나라는 우리가 바꿔야 해.
우리가 말이야.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거니까.
뭐라도 좋으니,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죽고 싶어.”
결의한 청년의 얼굴에서 노인은 눈을 뗄 줄 모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엇인가요?”
사실 노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승과 저승의 경계, ‘림보’에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이승을 떠나온 모든 이들은 림보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단 하나를 골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기억이 짧은 영화로 재현되고 나면, 이들은 그 기억만을 안은 채 영원으로 떠납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노인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와타나베 이치로(나이토 타케토시 분). 이승에서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철강 회사에서 정년까지 일했습니다. 아내와는 소개로 만나 결혼했고, 5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죠. 그리고 일흔한 살, 와타나베 씨도 세상을 떠나 림보에 왔습니다. 그는 선택할 기억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선택할 기억이 마땅히 없어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고만고만’이라 자답합니다.
림보의 직원들은 그에게 일흔한 개의 비디오 테이프를 전해줍니다. 여기엔 와타나베 씨의 삶 전체가 녹화돼 있습니다. 노인은 그 테이프를 하나하나 돌려 보며 잊고 있었을지도 모를 자신의 삶과 기억을 재생합니다. 즉 노인이 눈을 떼지 못했던 청년은 바로 그 시절의 본인이었습니다.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는 ‘나’. 와타나베 씨는 밤을 잊은 채 기억을 곱씹고 망각을 삼키며, 선택해야만 하는 삶의 어느 순간을 묵묵히 시청합니다.
여기까지, 영화 <원더풀 라이프>(ワンダフルライフ, 1998) 속 와타나베라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의 질문들이 머릿속에 침투하여 신경세포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단 하나의 기억. 저는 내일 당장 이승을 떠날 사람처럼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잠자코 있던 기억들을 아득바득 파헤쳤습니다. 쉽게 떠올려질 수 있지만, 쉽게 떠오르진 못했던 순간들. 기억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분명 망각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던 기억은 이 질문을 촉매로 무수히 돋아났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제 인생 ‘첫 기억’이었습니다. 네 살 무렵이었을까요. 해 질 녘, 거실을 가로지른 노을빛이 생각납니다. 빛을 평형대 삼아 따라 걷다 저는 현관에 다다랐습니다. 문득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고, 어머니는 제가 가장 아끼는 초록 형광 샌들을 신겨 주었습니다. 두 발로 땅을 지탱하던 푹신한 착화감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렇게 제힘으론 조금 버거웠던 현관문을 밀어 열고 한 발을 내디뎠습니다. 바뀐 공기 냄새가 코로 상쾌하게 들어옵니다. 뒤를 돌자 어머니는 그토록 기뻐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제 가장 오래된 기억이자, 아마 혼자 힘으로 밖을 나간 첫걸음이었을 겁니다.
기억. 그 단어만 들어도 아주 강렬하게 떠오르는 새삼스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KBS홀에서 상영됐던 ‘파워 디지몬 극장판’을 보고서 어머니 손을 잡고 누런 가을 냄새를 따라 집에 오던 길, 할아버지와 뒷동산에서 딱딱한 공을 찬 뒤 어느 어린이집의 뒷마당 토끼에게 풀을 먹이던 일, 멀미가 잦던 시절 먼 가족 여행에서 돌아오던 차 안에서 아버지가 따라 부르던 강산에의 ‘할아버지와 수박’을 듣고 달콤한 수박 맛을 상상하며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던 오후, 내게 의리와 쾌락을 아슬아슬하게 일깨워준 소꿉친구의 부탁을 거절해 절교를 당하던 날, 정수리부터 척추 끝까지 찌릿한 전기가 통하며 '마음'이란 것의 실존을 처음 인지한 밤. 이런 생동한 기억들은 오감으로 저장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것들은 가장 깊은 곳에 단단히 눌어붙어, 긁어내면 긁어낼수록 주위의 또 다른 기억들을 연쇄적으로 캐냅니다.
어느 날은 모처럼 중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삶과 일상 사이에서 소소한 추억거리를 곁들인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던 도중 그는 문득 이런 말을 꺼냅니다.
“야, 그 영어 선생님 있잖아. 가끔 뜬금없이 떠오를 때가 있다.”
놀랐습니다. 저 역시 살아가다가 난데없이 떠오르는 그 시절의 얼굴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몸이 조금 불편하셨고 발음이 부정확하셨습니다. 무서울 것 없이 학교를 군림하던 문제 학생들은 선생님께 놀림과 무시를 일삼았고, 수업은 통제를 넘어선 난장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당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그나마 그의 목소리를 듣는 단 한 명의 학생이 되는 것뿐이었던 우리는, 아직 각자의 마음에 방관이라는 부채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퍼즐 맞추듯 시절을 채굴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애써 망각하려 했던 순간의 멱을 틀어쥐고 눈앞에 데려다 놓는 의식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그때는 썩 즐겁게 남아 있지만은 않습니다. 당시 가장 질이 나빴던 학교에 랜덤으로 배정된 우린, 말은 안 했지만 망망대해를 부유하는 쌍둥이 외딴섬처럼 서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억의 교집합이 꽤 많았고, 미처 망각된 순간도 상대가 대신 메워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랑 다른 사람 같아.”
저는 한 술을 더 뜹니다.
“오래된 기억은, 내 전생의 기억이 몸에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터무니없는 대화처럼 들리지만, 그곳에서 저는 ‘기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몸속의 물은 한때 나일강을 흘러갔고, 몬순의 비가 되어 인도에 떨어졌으며, 광대한 태평양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루이스 다트넬, 『오리진』, 이충호 옮김, 흐름출판(2020)
우리 뼈의 조직, 우리의 신경 세포는 7년 전의 것과 다르다는 것.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는 이미 몇 번이고 바뀌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7년 전의 순간을 머리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만, 몸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우리는 그때 그곳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의 기원이 결국 모두 같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어느 곳이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일종의 말장난처럼 보여도,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 첫 번째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나의 기억’이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오래도록 ‘기억’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망각’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했는지도 모릅니다. 고백하자면, 이 같은 습성은 여전히 남아 기억이 깃든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오래된 사진이 담긴 박스와 JPG와 MP4로 가득 찬 외장하드, 어릴 적 쓴 일기, 과거의 휴대폰들이 바로 그 산물이죠. 저는 잊는 것과 잃는 것, 잊혀지는 것과 잃어지는 것을 가장 경계했습니다. 그것은 곧 ‘망각’의 과정 및 결과였고, 이는 ‘나’를 망가뜨리고 깎음질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원더풀 라이프> 속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단 하나의 기억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제게 가장 고통스런 질문이었습니다. 기억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 기억은 삭제된 채로 영원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억’이 삭제된다는 것, 그것은 곧 진정한 ‘죽음’을 뜻했습니다. 제가 만약 영화 속 세계에 있었다면, 끝내 기억을 선택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가지 못한 채 ‘림보’에서 영원히 부유했을 겁니다.
다른 이유지만, <원더풀 라이프>에서도 기억을 고르지 못해 오랫동안 림보에서 생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모치즈키 타카시(이우라 아라타 분)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이승을 떠나 림보로 왔고, 그렇기에 인생에서 딱히 고를 만한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죠. 저승에 가지 못한 이들은 림보에서 다른 이들의 기억을 재현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뜻밖의 사실에 직면합니다. 몇 년 전 저승으로 간 누군가가 선택한 기억 속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 즉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이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간 머리와 마음이 ‘둥’하고 울렸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글의 시작을 열었던 노인 와타나베 씨를 떠올렸습니다.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던 그. ‘살았다는 증거’, 이 말에 관해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어쩌면 와타나베 씨와 모치즈키 씨가 그토록 기억의 선택을 주저했던 이유, 그리고 제가 지금껏 그토록 망각을 두려워하고 기억에 집착했던 이유는 결국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때 ‘나의 기억 속의 나’가 아니라 ‘남의 기억 속의 나’라는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겁니다.
‘아, 나는 나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남의 기억 속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구나.’
그리곤 이내 깨닫습니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두 번째 대답, ‘나’를 구성하는 것은 ‘나의 기억’ 뿐 아니라 ‘남의 기억’도 나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 나의 망각과는 상관없이 나는 그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언젠가 내가 명백히 거기에 살았다는 증거라는 것.
“나는 내 남편이 노가 긴 배를 타고 이타케를 떠날 때의 모습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임명현 옮김, 돋을새김(2015)
‘오디세우스의 노래’를 뜻하는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대여정을 다룹니다. 이 이야기가 끝맺을 수 있었던 이유, 즉 오디세우스가 여정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향으로의 ‘귀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온전한 귀환에 가장 큰 몫은 ‘기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모험 중에도 절대 잊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오디세우스’라는 이름과 내가 떠나온 장소, 즉 그는 ‘내가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억하는 곳’을 늘 상기시킵니다. 이처럼 ‘나의 기억’은 그가 모험을 지속할 동기를 부여하고 끝내 돌아가야 할 목적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나의 기억’으로 시작해 ‘남의 기억’으로 완성됩니다. 그가 이타케에 돌아왔을 때 그를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그가 똑똑히 남아있다는 것은 결국 오디세우스가 ‘살았(살아 돌아왔다)다는 증거’가 됩니다.
오랜 시절 ‘나의 기억’ 속 세계에만 갇혀 지낸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기억이란 늘 완전하지 않습니다. 기억은 우리가 아무리 잊고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써도 바래지고 왜곡되며, 이승을 채 떠나기도 전에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의 숙명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선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생경한 기억을 부여하고 생산하며 부대껴 살아가야 합니다. ‘남의 기억’ 속에 새겨진 ‘나’는 때론 더 또렷하고 정확하며, 그 속에서 영원히 부유하며 불멸할 수도 있을 테지요.
우리가 누군가의 기억할 만한 존재가 된다면, 그게 바로 ‘살았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나의 기억’에서만 사는 이는 자꾸만 과거로 향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기억’에 남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줄곧 지금을 살아 내기에 바쁩니다.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결국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지금의 나를 과거로 한없이 덧칠해줄 뿐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내가 분명히 거기에 있었고,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기억해줘 / 내가 어디에 있든 / 기억해줘 / 슬픈 기타 소리 따라 / 우린 함께 한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줘, 윤종신)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무심코 재생한 음악이 불현듯 일깨우는 감각들. 어떤 음악은 우릴 특정 기억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선율은 언젠가 그 음악을 듣던 날의 냄새, 그때의 기분, 몸의 감촉을 불러일으킵니다. 음악은 기억과 들러붙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디선가 흘러나온 음악에 괜스레 아련해지고 코끝이 시큰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절에 두고 온 기억들은 한 곡의 음악으로도 쉽게 재생되곤 합니다. 즉 음악은 우리가 미처 망각했던 순간을 천천히 되감아 보여줍니다.
영화 <코코>(Coco, 2017)에서는 ‘Remember Me’라는 상징적인 음악이 등장합니다. 이 음악은 코코(아나 오펠리아 머기아 분)가 어린 시절, 아버지 헥터(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분)가 그녀를 위해 지어 준 곡입니다. 동시에 이 음악은 헥터가 그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불러 준 노래이기도 합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코코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가 됐습니다. 아버지 헥터에 관한 기억도 이제 더는 또렷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손자 미구엘(안소니 곤잘레스 분)이 그날의 노래를 그녀에게 불러 줍니다. 코코는 천천히 아주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조심스레 입을 열고 노랫말을 읊조립니다. 음악이 재생한 마법 같은 순간, 코코는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음악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와타나베 씨가 자신의 삶이 녹화된 일흔한 개의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 보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에겐 비록 삶의 비디오 테이프는 없지만 우리가 미처 붙잡지 못했던 기억을 다시 재생시켜 줄 음악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음악은 ‘나의 기억’과 ‘남의 기억’을 이어 주기도 합니다. 음악은 때론 사람에 들러붙어 우리가 함께한 순간이 선율에 영원히 박제되기도 하고, 때론 시대에 들러붙어 우리 각자의 순간이 거대한 이야기를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음악은 우리의 기억이 가장 숨기 좋은 저장고입니다.
저는 인간을 ‘기억을 먹으며 죽어가는 동물’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기억이 우릴 죽게 만든다’는 말이 아니라, ‘기억이 우릴 살게 만들고 비로소 잘 죽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말에 가깝습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수많은 이들의 기억들이 되물어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소중한 기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는 언제나 내가 아닌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기억은 결코 혼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억을 다채롭고 풍족하게 완성해주는 것은 결국 타인, 내가 사랑하는(했던) 사람들일 겁니다. 물론 기억은 선택적이지 못하기에, 우릴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잊고 싶을 만큼 고통스런 기억도, 평생 머물고 싶을 만큼 행복한 기억도 모두 섭취하며 생을 지나 보냅니다. 그러나 만약 <원더풀 라이프>처럼, 우리가 생을 마감했을 때 ‘단 하나의 가장 소중한 기억’만을 안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가피한 나쁜 기억들은 얼른 소화해 버리고, 남은 시간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루하루 후회 없는 멋진 기억들을 탄생시켜 오래도록 곱씹는 것입니다.
끝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문턱에서 꺼내 볼 행복할 기억이 많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그날을 상상하며 오늘도 기억을 먹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당신의 삶에도 늘 소중한 기억이 깃들기를, 그리고 곁엔 그 기억에 들러붙을 정겨운 음악이 흐르기를.
진상명
독립잡지 망막 창간호_오디세이아, '플리플리즈'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