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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Jul 10. 2022

삶이라는 단어가 따듯한 물에 풀어지면

<나의 해방일지>의 삶과 사랑

단어와 발음 사이의 신비성에 나는 때로 놀란다. 내 오랜 관심사는 '삶'과 '사랑'이었으니, 예컨대 두 단어를 혀와 입으로 굴려보면 그를 구성하던 자음과 모음이 데구르르 구르며 그것이 새삼 생경하게 느껴진다. 글자가 생명력을 얻는다.

삶, 입을 꾹 닫게 하는 단어. 모음 'ㅏ'로 입을 벌리고 자음 'ㄹ'로 혀를 굴리지만, 이내 'ㅁ' 때문에 입을 닫는다. 앙다문 입술이 누구에겐 완고한 의지처럼 보이겠지만,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서롤 단단히 지지해주어야 한다. 그 사이 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결국 '삶'은 1인분이다.

사랑, 'ㄹ'과 'ㅏ'가 만나 혀로 단단한 윗입천장을 튕기고 'ㅇ' 덕분에 부드러운 아랫입에 착지해 혀밑샘을 자극. 입술이 살짝 벌어진 단어인 것처럼 사랑은 내 안을 무언갈 드러내어야, 보여주어야, 안에서 밖으로 무언갈 밀어내야 한다. 나에 갇혀 있던 나를 잠시 해방시키듯.

'삶'이라는 굳은 단어가 따듯한 물에 풀어지면 '사랑'이란 무른 단어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삶을 발음하고 이어 사랑을 발음하면, 긴장한 입이 잠시 유연해진다.

척박한 벼랑 끝에도 이어져야만 하는 삶이 있고, 슬프게도 끊어질 수밖에 없는 死(죽을 사)가 있다. 그래도 그 사이 아주 가끔 浪(물결 랑)이 찰랑이고, 따가운 햇빛과 외로운 달빛이 물비늘을 만들어낸다.

"우린 너무 긴장하고 살아서 그래요."
(영화 <후쿠오카>, 소담의 대사)

입 안이 퍽퍽할 정도로 말라 붙어있을 때, 고작 물 한 방울이라도 딱딱해진 혀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앙다문 입으로 삶을 이어갈 때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물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 홀로 보내져 1인분을 살다 다시 홀로 떠나는 삶이지만 우리는 늘 입을 다문 채 살아갈 수 없다.


사랑을 발음해볼까. 입이 살짝 벌어지도록. 긴장한 삶에 따듯한 물이 들어갈 수 있도록. 삶에 하루 5분이라도 사랑을 채울 수 있도록. 외로운 내가 조금은 새어나갈 수 있도록.


P.S.

염기정. 작가가 백 번을 넘게 고민했을 문장을 기정은 백 초도 고민 않고 와락 내뱉는다.

염미정. 작가가 백 번은 넘게 고민했을 단어를 미정은 수 년을 묵혀 겨우 꺼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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