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틀게 된 이유
<드라이브 마이 카>를 틀게 된 것은 초면의 그이 때문이었다. 그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만지작거렸다.
처음 본 그이는 내 말에 유독 동의하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내 주장과 근거에 ‘음’이나 ‘흠’ 같은 소리를 내었고, 때때로 “그런가?” 혹은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같은 말을 했다.
오기가 생겼던 걸까. 동의를 받고 싶었던 걸까. 나는 더 자주 내 생각을 피력했고, 그럴 때마다 그이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았다. 그럴수록 그이는 내 눈을 피하는 듯했고 들릴 듯 말 듯한 얕은 한숨 내쉬며 천장이나 허공을 바라봤다. 평소의 나였더라면 ‘옳거니’ 하며 그이의 생각을 묻고 논리를 분석해 허점을 듣고는 또 반박하며 치열하게 합의점을 찾아 나갔겠지만 그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격성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이가 이 자리에서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 나를 해하려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나에 대한 공격이 아닌 자신에 대한 방어처럼 와닿았다.
흥미로웠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가 재밌었던 이유는 여러분이 제 말을 듣고 끄덕이며 공감을 해줬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제 말을 듣고 절레절레 하며 반박을 해줬기 때문이에요. 저는 제 말에 어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일 때 더 적확한 근거와 예시를 들고 싶은 욕구가 생기거든요. 오늘 그것이 자극됐고, 그래서 제 말을 잘 전달하려 더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내 말을 듣곤 그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머뭇거리며.
“일단 미안합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미안합니다.”
순간 나는 몹시 당황했고, 도리어 미안해졌다.
“아뇨. 진심으로요. 제가 입을 열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이, ‘혹시 내가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나’ 혹은 ‘내 생각이 짧거나 틀린 것은 아닐까’하는 부분인데요. 오늘 그것을 깊게 신경 쓸 수 있어서 좋았고 감사하단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이가 다시 머뭇거렸다.
“사실 제가 오랫동안 많이 힘들었습니다. 사는 데 아무도 필요 없다는 생각 때문에 긴 시간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지내기도 했고요. 감정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더라고요.”
짧은 시간 봤던 그이의 모든 표정이 이해됐다.
“어느 날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영화를 보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냥 터졌어요. 그때 느꼈죠. ‘나 정말 많이 상처받았었구나’, ‘나 사실 사람이 필요하구나’. 그 영화가 다시 나를 밖으로 나오게 했어요. 오늘 이 자리 나오기까지도 굉장히 고민 많았는데요. 혹시 기분이 나빴더라면 미안합니다.”
그이의 문장은 길지 않았지만, 그 문장을 다 뱉는 데까지 30분은 족히 필요했다. 어느 순간 울컥한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진 않다. 쩍쩍 거리는 초침과 우웅 거리는 공기 청정기와 함께 적막한 공기는 유달리 크고 무거웠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이가 나에 대한 공격성이 없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이는 나에게서 공격성을 느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렇게 의도 없이 오해와 상처를 주고받는 곳이었지. 해명은 없거나 늦되고.
아, 나는 내가 그토록 경계했던 말을 또다시 뱉어버린 것일까. 말은 덜고 또 덜어 필요한 만큼만 남기자는 다짐이 어느샌가 또 한번 무색해진 걸까. 무게 없는 말이 난무하는 시대를 그토록 개탄하면서 뱉어지는 말의 중량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닐까. 십수년간 되풀이하던 그 실수를.
<드라이브 마이 카>를 틀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그이의 얼굴. 영화는 가벼이 떠다니던 공기의 무게를 차근차근 더했고, 끝내 참던 눈물과 함께 못내 참던 말을 왈칵 뱉었다.
‘힘을 내’
‘그냥 살아가야 해’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말이 무게를 얻기까지 필요한 시간들. 말의 무게는 단어가 아니라 시간과 표현에 달려있다. 3시간의 무거운 시간이 지나고 스크린이 암전을 맞았을 때 나는 긴 잠에 들었다. 꿈에는 어떤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고, 그것은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그 얼굴은 처음 본 그이의 얼굴이었다가, 수년간 본 적 없던 그이의 얼굴이었다가, 잠깐 스쳐 갔던 그이의 얼굴이었다가, 처음 사랑하는 그이의 얼굴이었다가, 마지막 상처받는 그이의 얼굴이었다가, 절망하는, 경멸하는, 점멸하는, 전멸하는, 거짓말, 침묵, 진실. 그 얼굴들이 마구 비껴가고 뒤섞이고 뭉개지다 잠에서 깼다.
나는 다시 처음 봤던 그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펜을 들었다.
‘우리는 이렇게도 강하고 연약하게 이어져 있다’고.
#영화 #드라이브마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