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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물 Jul 13. 2023

육 궁(六宮)의 마음

제 손으로 보내는 길




후궁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몇 번이고 생각하게 된다. 왕을 사랑했더라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숙명이라고 해도 잔인하다.


중국 드라마 후궁견환전에 보면 총애를 잃은 화비가 본인의 시녀를 왕의 침소에 들여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했던 남자를 제 손으로 다른 이에게 보내는 길, 그 길에 떨어진 마음.






나를 거쳐간 여자가 몇 명일까.


스스로 자조하며 난 오늘 내 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 친구에게 떠나보냈다.


친구도 되지 못했던 첫사랑의 기억 때문일까, 난 이번엔 친구로 남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후궁의 마음을 종종 생각했다. 마치 후궁이 된 기분이었고 그 길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 곁의 달라지는 여자들을 두 눈뜨고 지켜봐야 했다.


때로는 시작할 때는 응원을, 슬퍼하는 날엔 위로를 하며 곁을 지켜줬다. 그렇게 언제나 늘 곁에 있는 건 나였는데 내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유사연애.

흔히 말하는 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유사연애였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겐 나는 본인의 옆자리가 비는 순간 채울 수 있는 대체재였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좋은 풍경을 보러 가는 데이트를 하면서도 그 자리는 내가 아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을 함께 하고 집에 들어온 날 문득, 이렇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남는 건 처참하게 부서진 내 마음을 스스로 주어 담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 길로 양쪽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난 소개팅의 주선자가 되었다.






잘 되어가는지 양쪽에게선 연락이 뜸하다.

서로에게 연락할 시간만으로도 바쁜 그들이 내게까지 연락을 줄 리가 없다.


문득 총애를 다시 찾기 위해 본인의 시녀를 왕의 침소를 들여보낸 화비의 마음을 생각한다. 내 처지 같군-.

자조적인 웃음이 나온다. 화비는 총애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나는 내가 살기 위해 그를 내 손으로 다른 이에게 떠밀었다.


곁에 있는 여자가 바뀔 때마다 부서지는 마음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청객일 나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웃으며 놀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조차 그때의 내가 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니 내 주변에 있던 이들은 나를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여즉 이렇게 안쓰럽고 아픈데. 


이런 사랑도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내 손으로 떠나보내는 사랑.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양쪽 다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사랑도 잃고 친구도 잃었다.

비로소 깨닫는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엔 친구로도 남아있을 수 없음을.


비가 내리는 날, 본인의 침소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울던 화비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글을 적는다.

이런 경험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한데 덕분에 금세 마음을 내주고 말던 버릇(?)은 조금이나마 고쳐졌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두드려보고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교훈을 줬던 한 때의 사랑.



언젠가 침소에서 하염없이 왕을 기다릴 육 궁(六宮)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보물을 찾았다. (또는, 보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배신과 더불어 왔다. 그 보물로 인하여 나는 상처 입었다. 차라리 보물을 찾지 못했더라면 하고 생각했다.

이제 어째야할까. 생각을 바꿔 그것이 보물이 아니었다고 결론짓고, 새로운 보물을 찾아나서야 할까. 아니면 그것이 가져온 이 배신마저도 보물이라 여기고, 다 좋은 척, 배신도 상처도 없는 척, 오직 즐겁기만 한 척 꾸미고 살아야 할까.

그게 삶일까.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어린 시절엔 길에 묻힌 사금파리 조각을 발견하고서도 혹시 그것이 별일까, 싶어 흙 속에서 파냈는데.


                                                          - 최인석, '작가의 말' 전문, '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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