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물 Jul 19. 2023

나만의 주기 찾기

퇴사 후 일상의 변화



퇴사 후 가장 피부에 와닿는 건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비난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공백인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손에 쥔 하얀 도화지. 어떻게 칠해나갈지가 당면한 과제가 되었다.




퇴사 직후 ~ 2개월 차


백수가 되고 나서 2개월이 되던 시점까지는 불안감과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실로 오랜만에(거의 처음으로) 오롯이 주어진 공백을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일상은 변했지만 내 마음가짐은 일할 때의 그대로라 이 시간을 어떻게든 알차게 써야 된다 라는 사명감과 같은 강박이 생겼다.


지나친 강박은 무턱대고 지갑을 열어 그동안 못했던 것들,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결제하게 했다.

PT 연장, 크로스핏, 피부관리, 줌바 댄스를 단 일주일 만에 모두 결제했다.


그리고 오전엔 운동을, 오후엔 줌바를,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피부관리를 받았다.

그렇게 하고 나니 비로소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심 뿌듯해했다.


운동과 백억 광년쯤 떨어져 있다가 갑자기 무리를 하니 이틀을 운동하면 하루를 아팠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내려놓지 못했다. 꾸역꾸역 일정을 소화해 나갔다.



그러다 무기력이 찾아왔다.



무력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그 열심히 하던 운동도 싫어지고 건강하게 먹는 것도, 나름 관리랍시고 받는 피부관리마저 가기 싫었다. 현실 자각 타임,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왔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하루에 두 번씩 운동을 한다고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나쁜 몸 상태가 단번에 좋아질 리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자 초조하고 불안해지다 못해 종국엔 무기력해져 버린 것이다.


복용약은 그대로였음에도 문득 찾아온 우울감과 무력감은 쉽게 떠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틀어박혀 2주 가까이를 보냈다. 모든 활동을 중지한 채 다시 폭식과 술, 침대에서만 누워있는 생활이 반복됐다.


결국 복용 양의 용량을 증량하고 나서야 조금 수그러들었고 병원 방문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퇴사 직전정도로 다시 상태가 나빠진 것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 2개월 ~ 4개월 차


원래도 공백을 잘 못 견디는 타입이긴 했지만 오래도록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일을 하는 타성에 젖은 삶에서 갑작스러운 변화를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나를 혹사시킨 것 같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적당한 일을 찾아보자-.'

일상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와 경제적인 부족함을 메꾸어 줄 수 있는 그 정도인 일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단기 계약직에 지원해 합격했다.


다시 일정한 시간의 기상, 취침, 정해진 업무를 해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조금 쉬었다고 처음엔 다시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일하려니 하루를 버티는 게 쉽지 않았다. 직장이 집과 꽤 거리가 된 탓에 일찍 일어나야 했고 출퇴근 시간도 왕복 2시간 이상이 소요되다 보니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서 자기 바빴다. 직장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이 기간에도 역시나 운동을 하지 못했다. 고된 출퇴근에 녹초가 돼버렸고 8시간씩 앉아있는 게 고역으로 느껴졌다. 적응하기에 벅찼고 직장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다시 소속이 생기고 경제적인 활동을 하자 불안은 잠재워졌다.


업무강도도 낮아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평안한 시간이었다.




퇴사 후 4개월 ~ 현재


드디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일하는 직장 동료들과의 여행을 먼저 주도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미루고 미루던 헬스장을 다시 찾았다.


반복된 미루기와 노쇼를 밥먹듯이 하던 말썽쟁이 회원을 트레이너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너그러이 받아주셨다. 꾸준한 중량 웨이트와 30분의 유산소는 드디어 체력 증가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기상 시간도 30분씩 앞당겨 5시 30분 ~ 6시에 일어나는 기상 습관도 만들었다.


1일 1 운동, 일정한 시간에 먹는 건강한 세끼, 간간히 하는 추가적인 단기 알바. 캘린더에 매일 한 개 이상의 일정이 적혀있었지만 지치지 않고 해내는 중이다.


이렇게 남은 하반기를 보내면 틀림없이 다른 모습의 내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비로소 들던 어느 날,



이직 제의가 왔다.






시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첫 술에 결심한만큼 알차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몸소 깨달은 시간이었다. 알차게 라는 기준 또한 각자 다르단 것도. 어떤 것을 하든 시간을 겨우 메꾸었다는 느낌보다는 보냈다는 느낌이 들 때에야 비로소 시간을 제대로 쓰게 되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낭만도 돈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