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리아빈, 전주곡 Op. 11의 1번
"창욱님의 상상을 더 자유롭게 펼쳐보세요."
첫 시간 선생님이 한 말씀이었다. 이 곡의 화음을 들으면 어떤 모습이 생각나세요? 저는 북극의 오로라가 하늘을 가득 덮는 광경이 떠올라요. 저 먼 밤하늘에 초록빛 오로라가 커튼처럼 내려오는, 그런 모습 있잖아요.
오로라라니, 스크리아빈 전주곡 1번의 5도 펼침화음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들어보면 1분도 안되는 이 짧은 곡에 정말 오로라가 들어있다. 물론 그 오로라를 내 손으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지만. 절제에 절제를 거듭해야 하는 바흐의 느린 악장 수업을 마친 직후였던 나는 상상력을 펼쳐보라는 선생님의 그 말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리고 상상력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가 스크리아빈일 것이다.
스크리아빈은 1872년에 태어나 1915년에 생을 마친 러시아의 작곡가다. “불의 시”나 “법열의 시” 등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화성을 사용한 후기의 작품들이 유명하지만, 초기만 해도 쇼팽의 영향이 듬뿍 묻어나는 애수 어린 작품을 썼다.
작품번호 11번 전주곡도 그렇다. 쇼팽처럼 스크리아빈의 전주곡도 24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쇼팽의 전주곡만큼 아름답고 촉촉한 멜로디로 가득 차있다. 나는 악보가 오자마자 연주를 들으면서 치고 싶은 악보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스크리아빈은 1888년부터 8년 동안 유럽 곳곳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24곡의 전주곡을 작곡했다. 그래서인지 각 악보의 끝에는 도시 이름과 연도가 적혀있다. 1번은 Moscou Novembre 1895(모스크바, 1895년 11월), 3번은 Heidelberg Mai 1895(하이델베르크, 1895년 5월), 그리고 파리, 암스테르담, 드레스덴, 키예프, 비츠나우까지. 음악을 연주하면 유럽 전역을 전전하는 여행자가 될 것만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19세기 그랜드 투어는 시작하자마자 암초를 만났다. 문제는 폴리리듬polyrhythm이었다. 전주곡 1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5:3 폴리리듬이 나온다. 왼손이 5개의 음을 치는 동안 오른손이 3개의 음을 치라는 의미이다. 5박 리듬도 흔치 않은데 그걸 3개로 자르라고?
서로 나눠 떨어지지 않는 다른 수의 박자를 동시에 연주하는 경우를 폴리리듬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한 손이 2개의 음표를 칠동안 다른 손이 3개를 치거나(2:3), 음 3개를 치는 동안 다른 손이 음 4개를 치는 경우(4:3). 폴리리듬이 전면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곡이라면 역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일 것이다. 이곡 전체에서 왼손이 6개의 음을 짚는 동안 오른손이 8개의 음을 치는 4:3 폴리리듬이 등장하니까.
나는 폴리리듬이 주는, 박자가 해체되었다 재조립되는듯한 그 오묘함을 좋아한다. 리듬이 아닌 것 같은 그 리듬, 두 발이 오묘하게 맞지 않는 듯한 걸음걸이, 그러나 결국 다시 만나게 되는 천구의 음악을 좋아한다. 수 억년을 자신의 주기로 돌던 행성들이 어느 순간 정렬하게 되는 그 순간, 폴리리듬은 내행성과 외행성의 운동을 손위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물론 그런 아름다움은 연주가 그럴듯하게 들어줄 때만 나타난다. 이전에 연습한 슈베르트의 작품에도 2:3이나 3:4 폴리리듬이 자주 나왔지만, 내가 만들어내는 행성 운동은 영…, 석연찮았다. 이게…, 행성이…, 이렇게 돌아도 되나…, 뉴턴과 케플러도 못찾아낼 무질서로… 돌다 말다 하는 거 같은데….
게다가 5:3 폴리리듬은 생전 처음보는 모양이라 연습하려면 우선 간단한 계산부터 해야했다. 두 리듬의 최소공배수인 15로 한 마디를 나눈 후, 어느 타이밍에 무슨 음을 먼저 연주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체크해본다. 그러고나서 유튜브를 찾아보며 연습하는 것이다(유튜브에는 5:4부터 21:23까지 별별 폴리리듬 연주하는 법을 담아놓은 영상이 있다. 세상에…).
그리고 폴리리듬은 웬만하면 정말 안맞는다. 그 어떤 연습보다도 폴리리듬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데, 무의식중에 하면 비슷하게 연주가 되다가도,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틀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폴리리듬 연습은 오히려 컨디션이 바닥인 야근에서 돌아온 밤이 하기 좋았다. 생각없이 같은 음을 반복해서 치면서, 몸에다 5와 3의 리듬을 새기는 것이다. 그러고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이면 신기하게 리듬이 잘 쳐지기도 했다.
전주곡 1번을 익히는 동시에 전주곡 2번과 6번도 함께 연습했다. 새로운 곡을 들고 갈 때마다, 내가 폴리리듬이 너무 어렵다고 투덜거릴 때마다 선생님은 상상력을 강조했다. 오로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뭐든 괜찮으니까 창욱님의 광경을 만들어보세요.
그것은 깊게 잠든 근육을 깨우는 과정과 비슷했다. 업무 시간에는 상상력을 발휘할 일이 거의 없는데(오히려 상상력은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전주곡을 연주하는 2분 동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최대한 눈앞에 그려봐야 했다. 선생님은 오로라를 얘기했지만, 저는 2번을 치다 보면 흰 벌판이 떠올라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LP의 커버로 실릴 것 같은, 유화로 그려진 러시아 농촌의 초겨울 모습이. 잔설위로 그늘이 깔려 스산하기 그지없는 겨울 평원이.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스크리아빈을 칠 때가 일주일 중 가장 비일상적인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번을 지나 전주곡 3번을 연습중인 지금도 나는 여전히 악보 곳곳에 암초처럼 도사린 폴리리듬이 껄끄럽다. 암초에 부딪혀 리듬이 제멋대로 튕겨나갈 때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긴다. 상상력을 열어 보세요. 이 음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주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나는 전주곡 악보의 마지막 마디를 본다. 여기에는 나를 정말로 먼 곳으로 데려가는 문구가 있다. 스크리아빈이 곡을 완성한 후 마지막에 썼을 'Moscou Novembre 1895'. 이 짧은 문장에 싸락눈 사이로 입김이 날리는 모스크바가 보인다. 쇼팽을 동경하던 젊은 스크리아빈이 11월의 모스크바의 어느 거리를 걸었을지, 보도의 돌이 구두와 부딪치며 어떤 소리를 냈을지 상상하게 된다. 그가 교외의 눈덮인 벌판을 보면서 어떤 음을 쓰려고 했을지 상상하고 첫 다섯 음을 연주해본다.
음악이 나를 싸락눈 날리는 모스크바로 데려가는 순간에는, 염병할 5:3 폴리리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