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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방통 Jan 09. 2022

2021, 올해의 피아노

피아노와 클라이밍에서  배운 점

내 올해의 피아노 음악, 스크리아빈의 전주곡 Op. 11의 2번. 리히터 연주


피아노 학원을 다시 다닌 지 2년째, 올해는 24번의 수업을 들었다. 한 달에 두 번 꼴로 수업을 들은 셈이다. 일단 여기서 축배 한 잔! 바빴지만 자네, 올해도 꾸준했구먼! (저 술 못 마시니 무알콜로 부탁드려요!)


2021년 연습한 곡들
올해도 여러 새로운 작곡가들을 접했다. 백건우 님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연초는 슈만의 Op.111-3번 작품을 배웠다. 포레의 돌리 모음곡 1, 2번을 선생님과 잠깐 맞춰보다가, 봄 들어서는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의 2번을 쳤다. 다른 곡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일부러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스케일이 주로 나오는 곡을 골라본 것이다. 좋은 도전이었던 것 같다. 연습하면 나도 이런 곡을 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니.
초여름에는 브람스의 Op.118의 첫 간주곡을 쳤다. 두쪽밖에 안 되는 짧은 악보를 거의 여름 내내 봤다. 작년 말에 배우다가 코로나로 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수업을 중단한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의 2악장도 마저 배웠다. 이 2악장이 가장 어려운 곡인 것 같다. 수업은 어찌어찌 끝냈는데 아직도 이 곡의 도입부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쳐야 할지 모르겠다….
하반기는 스크리아빈의 전주곡 Op. 11에서 세곡을 연습했다. 1번과 2번, 6번. 1번 폴리리듬의 난해함에 대해 주절주절 썼지만 사실 가장 좋았던 곡은 2번이었다. 올해 듣고 연습한 피아노 음악 중 제일 좋았다. 진심으로.
하반기 피아노팬들에게 가장 큰 사건은 아마 1년 연기되어 열린 쇼팽 콩쿠르 아니었을까. 나도 많은 결선 라이브를 찾아보며 쇼팽을 흠뻑 젖을 만큼 들었고,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쇼팽 음악과 쇼팽을 치고 싶은 마음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치게 된 쇼팽 곡이 피아노 소나타 2번 3악장 ‘장송 행진곡’이었다.


2021년의 포기와 실패
사실 2021년을 시작할 때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아마도 21살 혹은 22살 여름, 밤을 새우고 술 덜 깬 채로 대학교 매점 2층 피아노로 처음 18번 변주를 쳤을 때부터)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팬이었다. 그랬으니 올해부터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변주를 하나씩 연습해서 몇 년 동안 변주곡을 쳐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3월까지는 아리아와 1번, 2번 변주까지 수업을 들으며 연주를 했다. 그런데 음표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져서 가늠이 되지 않는 3번 변주부터 동력을 급격하게 잃었다. 아직 쳐보지 못한 작곡가가 많은데 이걸 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일을 11월에 또 겪었다.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버린 나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곡을 꼭 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실 3악장은 쇼팽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칠 수 있을 정도지만(그게 나다), 나머지 세 악장은 절대 그렇지 않다. 테크닉의 한계가 필요한 1, 2악장과 들어도 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4악장까지…. 이 곡을 꼭 치고 싶은데 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니, 선생님이 녹턴부터, 프렐류드부터, 에뛰드부터, 스케르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자고 하셨지.

어제는 시작한 지 반 년된 회사 후배와 클라이밍(볼더링)을 했다. 엄청 재능 있는 분인데 아직 경험이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아무나 못하는 구간을 손쉽게 성공하고는, 차분히 가면 되는 구간에서 떨어지고 만다던가.
그분을 보면서 내가 처음 볼더링을 시작하던 때를 생각했다. 나는 이제 곧 볼더링을 시작한 지 4년 차가 되는데, 실력이 팍 올랐던 건 처음의 1년이었다. 그리고 그 후 3년 동안은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데 쓴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볼더링 문제를 보면 얼추 저 문제가 내가 풀 수 있는 문제인지, 택도 없는지 대충 감이 오는 것이다.

피아노 수업 2년 차를 마무리하는 내 감상도 비슷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더닝 크루거 효과’ 그래프에 빗대면, 지금까지 나는 ‘우매함의 봉우리’, 즉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던 거 아닐까.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쇼팽 소나타를 치고 싶어 깝죽거렸는데, 그것은 내 수준을 모를 정도로 피아노를 몰랐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오래 걸리는 배움 아닐까.


그니까 작년까진 저 우매함의 봉우리 정상에 있었다는 거다(이미지 출처는 다음 블로그)


2022년의 계획
2022년, 올해는 에뛰드와 평균율로 시작한다. 음 하나도, 마디 하나도 제대로 못 치는 상황을 마주하는데, 어렸을 적 바이엘과 체르니 시절 이후로 처음 겪는 기분이다. 지금까지의 수업과는 좀 달라질 것 같다. 에뛰드 한 곡을 오랫동안 꾸준히 치면서 테크닉을 늘릴 것이다. 지금의 굳고 거친 손으로 과연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만.
마지막으로, 모순되게 들리겠지만 그래도 나는 무식하고 오만하게 아무 작품에나 덤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수준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이를 넘는 난이도에 도전해야 머무르지 않고 더 성장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 그래야 더더욱 나를 알 수 있고 나의 외연도 확장할 수 있을 테니.


이런 뻔뻔함으로 언젠가는 골드베르크와 쇼팽 소나타를 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살려한다. 나를 아는 겸손함과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약간의 뻔뻔함, 이것이 내 2022년 계획이다.


*추신 : 가능하면 예전보다 피아노 일기도 더 자주 써보려고 한다. 찾아보니 작년에는 피아노 일기를 4번밖에 안썼네... 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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