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두 루푸 앞에서 꿀잠 잔 이야기
피아노 연습의 좋은 점은 위대한 대가들의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연주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피아노 연습의 나쁜 점은 위대한 대가들의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망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내 연주에는 한계가 있고 보통은 들어주기 힘든 수준이다. 그럴 때는 연주회에 간다.
연주회는 피아노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예전보다 더 열심히 피아노 연주회 일정을 챙기기 시작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자주 찾아와 공연도 많이 열려서 연주자나 프로그램을 보고 볼 공연을 정한다. 내가 아는 곡을 연주하면 아는 대로 곡을 즐길 수 있어서 좋고, 모르는 곡을 하면 그 기회에 새로운 음악을 만날 수 있어 좋다.
다만 내게는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대부분의 연주회에서 예외없이 졸게 된다는 것이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든 갓 데뷔한 신예든, 나는 공연장 피아노 앞에서 어김없이 졸았다. 집중력이 부족하고 산만해서 그런 걸까? 하지만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까지 배불리 먹고 공연을 보러 가면 졸린게 당연한 거 아닐까. 거기다 따뜻하고 푹신한 의자에 공연장의 조명이 꺼지면 졸기에 최상의 환경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오늘의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의 느린 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잠의 요정에게 매혹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써야 한다.
이걸 공연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은 공연 중에는 신나게 졸았던 공연이 많다. 임동혁이 샤콘느를 연주하는 동안 살면서 가장 달콤한 잠을 잤다(그 전날 과제 하느라 3시간 밖에 못잤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페라이어가 연주한 함머클라비어는 3악장에서 졸음과 싸운 기억밖에 없다. 심지어 내 인생 최고의 연주 중 하나였던 쉬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 중간에도 졸았다. 하지만 졸음과 싸운 기억 중에서도 단 하나를 꼽으라면, 2010년 배낭 여행 때 만난 라두 루푸의 공연이었다.
매년 5월 12일이면 프라하에서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가 열린다. ‘프라하의 봄’은 대개 1968년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축제는 1946년부터 열리기 시작해니 그보다도 유서가 깊은 축제다. 5월의 프라하는 봄이라는 어감이 무색하게 쌀쌀하고 축축했다. 거의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나는 오전에 시내에 나가 공연 티켓을 사고 강가를 돌아다니며 박물관을 기웃거리다, 저녁에 공연을 보고 맥주 한 잔을 마신 채 숙소로 돌아왔다. 닳고 닳아 반들반들해진 석조 보도가 비에 젖어 노란 나트륨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돈이 없으니 값싼 맥주를 주로 마셨는데, 그래서인지 저녁이 더 춥게 느껴졌다.
음악제의 다양한 공연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무대는 두 번으로 예정된 라두 루푸의 공연이었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섬세한 터치의 슈베르트 연주로 유명했다. 그보다도 연주와 공연을 하지 않기로, ‘은둔의 연주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그런 분을 만날 수 있다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한 번은 독주회였고, 그 이튿날에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협연 무대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떻게라도 봐야겠기에 가장 싼 좌석을 예매했다.
그것이 큰 실수였다. 연주회 당일, 자리에 앉고 나서야 나는 내 좌석이 무대 뒷편 시야제한석이라는 걸 알았다. 무대에 설치된 구조물이 공연자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커녕 피아노 뚜껑만 겨우 보였고, 무대에 나온 피아니스트가 관객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만 피아니스트를 볼 수 있었다. 좌석이 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연자가 보이지 않으니 공연이 시작되는지도 몰랐다. 피아노 연주가 들려오긴 하는데 야나체크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의 ‘안개 속에서’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날은 추웠고 나는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막 따뜻한 공연장으로 들어왔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참을 수 없이 졸렸다. 역시 피아니스트가 안보인다며 불평하던 앞쪽 남자 관객 여러 명이 공연장을 나가버려 혼자가 되자, 나는 코만은 골면 안된다는 심정으로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 공연장에서 공연 1부를 어떻게 들었는지, 아니 그 공연장에 존재하긴 했는지 알 길이 없다. (라두 루푸라고 추측되는) 연주자가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연주할 때 내가 한 일은 감상이라기보다는 의식을 잃지 않고 그곳에 존재하기 위한 실존의 투쟁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시라던데. 음악도 모르는 내가. 멋진 경험 한 번 해보겠다고. 내 딴에 큰 돈 써서 왔는데. 시야제한석에서. 이렇게 졸고 있으면 안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라 생각할까. 중간 휴식 시간, 차려 입고 칵테일을 즐기는 관객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여유와 즐거움이 아니라 사회적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다.
2부가 시작되고 잠은 깼지만, 나는 여전히 피아니스트를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갈 길을 잃은 내 시야는 공연장을 메운 관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도 가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이부터 한껏 멋을 내고 온 부인, 아까 칵테일을 즐기던 커플,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졸고 있었다. 모두가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 필사적으로 졸음과 실존 사이의 마찰을 견디는 일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고 어떤 분은 졸지 않기 위해 미친듯이 애를 쓰는 게 50m 바깥에서도 보였지만 머리가 까딱까딱 거리고 있었다(아마 반대편에서 나도 저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 모든 사투가 루푸가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가운데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연주자는 물론 관객들과도 이어지는 경험을 처음으로 했다. 그 결과가 감동이든, 졸음이든, 음악은 참말로 인간을 하나되게 만드는 만국공통어구나! Musik ist eine universelle Sprache!
그 날 저녁 나는 공연 관람이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훈련과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 행위이며, 그렇기에 관람 경험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기회라는 걸 느꼈다. 동시에 공연장에서 졸던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예의범절과 사회적 약속도 생리 현상을 이길 수 없구나 싶어서. 그보다도,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공연장은 따스하고 편안한 공간이구나 싶어서.
그 후로 나는 더 많은 피아노 음악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공연장에서 존다. 그렇게 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라두 루푸를 생각한다. 그는 내가 이해도 하지 못하던 시절에 다가온 음악가이자, 피아노 공연으로 접속하는 길을 제공해준 은인이었다. 나는 그의 몇 남지 않은 브람스와 슈만, 슈베르트 앨범을 들었고 아름다움에 전율하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좀 더 늦게 그를 만났더라면, 혹은 좀 더 몸이 따뜻한 상태로 그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면, 졸지 않고 공연을 더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좋음을 뒤늦게 깨닫고 연주를 들으며 후회하는.
라두 루푸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2022년 4월 18일이었다. 나는 프라하 공연의 정보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이미 12년 전의 일이었고,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관련 자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래된 데다 너무 졸아서 내가 그 공연에 가긴 했나 의심이 들 무렵, 그날의 공연 사진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인사를 하는 루푸의 등 뒤로 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졸린 눈의 내가, 까만 얼굴로 겨우 잠이 깨서는 박수를 치는 내가 있었다. 그 사진이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피아니스트에게, 내가 선물인지도 몰랐던 음악이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사진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prague-spring/4614451385/in/album-72157623939511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