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보다 공원에서 먹는 샌드위치가 더 좋았다.
베를린은
물가가 저렴하기로 유명하다.
베를린 생활에서 놀라웠던 점 하나는 마트에서 장보기였다. 카트 한가득 담아도 10만 원을 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었다. 한국에서라면 20-30만 원은 나왔을 텐데. 초기 한 달 간은 언니와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너무 싼 가격에 계속 놀라워했었다. 웬만한 식료품은 1~2유로 사이의 가격이었다. 식빵 한 줄 1유로, 캔맥주 0.5유로, 바나나 한 송이 1유로 등등. 와인은 1~2유로짜리도 웬만큼은 맛있었다.(물론, 비쌀수록 맛있긴 하지만)
물가가 저렴한 이유는 대기업 마트 간 경쟁, 농산물 수입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유로 통합 및 독일 통일 등으로 물가 기준이 낮아졌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저렴한 물가의 배경에는 불편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긴 하지만,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저렴한 물가가 좋긴 하다. 가난한 사람이나 중산층이나 일상적인 생활의 질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외식보다는
먹을 것을 싸서 다녔었다.
반면, 외식비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장 봐서 만들어 먹는 것이 너무 저렴하였기에, 외식을 자주 하지는 않았다. (사실.. 사먹는 밥이 그리 맛있지 않기도 했다 ㅠ,ㅠ) 가끔 주말에 언니네 가족들과 집 근처 이태리 음식점, 그리스 음식점에서 한 끼를 해결하거나, 혼자 외출하면 되너 케밥, 커리부어스트, 수제버거 정도를 사 먹는 정도였다.
대부분은 집에서 먹을 것을 간단히 싸서 다녔었다. 메뉴는 과일과 빵, 샌드위치, 맥주나 와인, 물 등이었다. 마트에서 사 온 빵과 과일, 치즈 등의 재료를 활용해서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크로와상과 바나나 하나씩을 들고나갔었다. 좀 멀리 간다 싶으면, 캔맥주 하나를 가방 안에 넣었었다.
공원에서의 도시락,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먹는 기분이었다.
도시 관광이나 박물관 관람을 한 뒤, 공원에 앉아 먹는 샌드위치, 과일 그리고 맥주는 정말 꿀맛이었다. 워낙 좋은 날씨였다 보니, 공원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았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테라스에 돈을 내고 앉지 않아도, 집에서 싸온 음식만으로도 어디서나 레스토랑 테라스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충분히
도시락을 싸서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왜 베를린에서 유독 그랬을까?
사실 한국에서도 도시락을 싸서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베를린에서 유독 이렇게 도시락을 싸서 다녔을까?
한국에서 도시락을 싸서 다녔던 경험이 없진 않다. 몇 년 전, 회사에 다닐 때, 집에서 먹을 것을 싸서 다닌 적이 있었다. 다른 직원분들이 점심 먹으러 밖으로 나가면, 그제야 탕비실 냉장고에서 도시락을 꺼낸다. 그리고 작은 내 사무실 책상에 서류들을 치운 뒤, 모니터로 인터넷 뉴스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점심을 먹었었다. 도시락을 먹은 후, 남은 시간 동안 잠시 걸으러 나갔다 왔었다. 그렇게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끝났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음식이 질리기도 했고, 사무실 안에서 밥 먹는 것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어디에나 공공공간이 풍부했다.
베를린을 돌아다녀 보면, 도처에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앉아서 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풀밭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다. 외투를 벗어 깔고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 맥주나 와인을 나눠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혼자 도시락을 먹든, 혼자 맥주를 마시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각자 자기만의 휴식을 취한다. 아무리 물가가 저렴했다 하더라도, 눈치보지 않고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공공공간을 도시에서 찾기 어려웠다면, 선뜻 도시락을 쌀 수 있었을까? 도시락을 싸서 나간다 하더라도, 자리를 잡고 편하게 먹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한다면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도시에
더 많은 공공공간을 바란다.
우리의 도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일상생활 공간인 동네 거리에서 벤치나 광장, 소공원 등을 쉽게 찾을 수 있었나? 도시락을 싸서 나왔다 하더라도, 여유 있게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어도 되는 분위기 속에서' 편안하게 먹으려면 어딘가에 돈을 지불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 곳이 없다면, 길에 서서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싶진 않다.
서울에서는 일상적 공공공간을 찾기 힘들다.
공공공간이란 우리가 집이나 사무실 등 건물을 나서서 만나는 거의 모든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 공원, 광장, 공공건축 등이 포함된다. 일상적 공공공간이란, 집에서 학교나 회사 등 일상적 생활이 이루어지는 동네에서 이용하게 되는 공공공간을 말한다. 서울에서의 삶(정확히는 서울의 다세대다가구밀집지역에서의 삶)에서 일상적 공공공간은 가로공간이 전부였다. 나는 자동차가 없이 '걸어다니는 사람'이기에, 자동차로 점령된 공간 속에서 상대적으로 좁고 위험한 공공공간을 매일 마주하게 된다. 이 공간들 중에 내가 잠시라도 머무르고 쉴 수 있는 곳은 없다. 작정하고 이동하지 않는 이상.
이미 시민들의 일상생활 공간인 도시/지역 중심지는 대부분 사유화되었고, 남은 국유지는 거의 도로 공간뿐이다.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곳에 국유지가 남아있는 정도. 이렇다 보니, 국가 소유의 땅이면서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공공공간을 확보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공공공간은 앞으로 점점 중요한 도시 요소가 될 것이다.
도시의 이미지, 브랜드는 만드는 것은 가로에서, 공공공간에서의 이미지이다. 1인 거주면적이 좁은 도시에서는 집 안의 삶뿐 아니라 집 밖의 삶도 중요하다. 집 밖의 공공공간은 시민들의 점점 다양해지는 활동에 대응해야 한다. 우리 도시는 점점 좋은 공공공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도로공간을 최대한 사회적 활동의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내 공공공간에 대한 통합적 계획과 단계적인 실험들이 필요하다. 또한 다양한 개발기법을 활용하여 중심지 내 오픈스페이스를 확보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그리고 지자체의 의지(단체장의 의지), 그리고 민간사업자와의 파트너쉽, 지역주민의 참여,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일단 유권자, 주민으로서 지역 내 일상적 공공공간에 관심을 갖는 것이 시작일 것 같다.
돈을 지불하고 식당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 공원에 앉아 먹을 수 있는 공공공간이 풍부한 서울을 상상해 보았다. 집, 식당 외에 혼자 쉬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뭔가 먹을 수 있는 제3의 공간이 나에게 있다면 내 일상이 좀 더 풍족해질 것 같았다.